깊은 사유의 필요성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안개가 잔뜩 꼈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창문 너머의 바깥 세상은 온통 백색이다. 어두운 것 같기도, 밝은 것 같기도 한, 포근한 백색. 산꼭대기에서 이런 안개를 마주하면 좀 당황스럽다. 내가 높은 고도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믿기지 않기 때문에. 내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곤 하기 때문에. 비행기 이륙 후 30분만 지나면 자신이 날아다니는 물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는 것처럼, 초반의 덜컹거림은 사라지고 당혹스러운 고요함이 내 감각을 둔화시킨다. 그리고 그 고요함은 부드럽게 속삭인다. 겁먹지 말라고. 마치 아프고 불완전한 현실을 어느 정도 여과해서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처럼. 영화. 감상을 남기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가타카, 이터널 선샤인. 그러고 보니 둘 다 약간 안개 같은 영화네. DNA, 기억.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걸 다루는 영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힘이.... 툭. 툭. 누가 내 어깨를 친다. 고개를 돌린다. 관측병이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연신 히죽거리며,
“아니, 무슨 멍을 그렇게 때리십니까?”
“...”
“몇 번을 불렀습니다.”
“잠시 안드로메다에 갈 뻔했다.”
“예, 너무 멀리 가시길래.”
“고맙다, 붙잡아줘서.”
그렇다. 좋게 말하면 사색하는 걸 좋아하고, 나쁘게 말하면 멍 때리는 걸 좋아한다. 툭하면 멍 때리고 싶어 하는 나의 습성 때문에 일할 때는 종종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한다. 나름의 집중력 향상 운동, 정신줄 잡기 위한 몸부림이다. 타인과 있을 때는 정말 멍 때리면 안 되기에. 그래서 가끔 너무 바쁘고 힘든 날 퇴근하고 나면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멍의 바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곤 한다. 혼자 있는 걸 종종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때가 유일하게 맘 편히 멍 때릴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멍은 일종의 꿈 같기도 하다. 멍 때릴 동안에는 온갖 수만 가지 생각을 하곤 하는데 정신 차리고 나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래도 몇몇 번쩍이는 생각의 잔재들은 남아있다. 투명한 포장지에 꽁꽁 싸매진 채. 또 어디로 사라지려고, 붙잡아보려 하지만 이미 배송은 시작된다. 도착지는 불명. 그럼 난 번쩍이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미련 없이 훌훌 털고 일어나 할 일을 찾기 시작한다. 작고 소중한 무엇들은 자꾸만 그렇게 사라진다. 사라지는 생각들이 못내 아쉽다. 날 30분 동안 미동 없이 앉아있게 할 만큼의 중요한 생각들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은 그 소중함을 붙들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누군가는 말한다. 자꾸 멍 때려 버릇하면 뇌세포가 죽는다고. 으잉? 정말 그런가 싶어 인터넷에 검색해봤는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멍 때리기가 뇌의 수행 능력과 창의성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멍 때릴 때 우리는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때문이다. 멍이라는 것은 상상이 깊어졌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자가최면 상태이므로. 어쩌면 멍은 우리가 굉장히 깊은 생각을 할 때 그 어떤 외부적 요인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집중하기 위해, 감각을 일정 부분 차단해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건 마치 인간이 깊은 고뇌를 통해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창조주의 세심한 배려일 것이다. 어떤 창조주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낮에 억압된 무의식적 욕구를 밤에 해소시켜 일상생활을 가능케 해준다는 꿈처럼, 멍 역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을 관리하는 뇌의 ‘해마’는 우리가 멍을 때릴 때 활성화되어 뒤엉키고 복잡한 머릿속 정보들을 정리한다고 한다. 또한 멍 때리는 동안 그동안 끊겨있던 뇌의 신경들이 연결되어 예상치 못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 혹시 멍 때릴 때 두뇌에 손상 간다고 누군가가 핀잔을 준다면, 꼭 일깨워주자.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E = MC²’,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은 모두 깊은 고뇌, 멍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또한 우리는 멍을 때릴 때 유일하게 ‘나’ 자신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그 시간만큼은 관측병이 내 옆에서 이름을 부르던, 춤을 추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누가 읽을 수도 없다. 혹 누군가는 반박할 수 있다. 표정만 보면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 수 있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얘기해주자. 멍 때릴 때 자신도 모르게 짓는 특유의 얼빠진 표정조차,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생각이 읽히는 걸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포커페이스라는 것을. 심지어 멍 때리는 시간이 끝나고 나면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도 못 하곤 하니, 아마 ‘멍’은 존재하는 모든 생각들 중 가장 진솔한 생각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관측병이 내 어깨를 툭툭 쳐 끊겼던 ‘멍’의 똬리를 마저 틀어 보자면,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힘이 있다. 눈을 감아도 우리는 어둠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 바로 상상의 힘을 통해. 하지만 사회는 불가피하게도 우리가 긴 시간 동안 깊게 사유할 기회를 별로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소중한 생각들을 잃어간다. 그건 번쩍이는 아이디어일 수도, 낭만일 수도, 배려일 수도, 어쩌면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것들을 아무 쓸모도 없는 잡생각들이라고 폄하할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톱니바퀴가 되어 일 할 때만큼은 그런 생각들이 정말 방해가 되니까.
하지만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멍’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그런 생각의 흐름에 잠식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복권처럼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행운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이 바로 ‘멍’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재정비하고 추진력을 모아, 다시 한번 강하게 박차 오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이 바로 ‘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늦은 밤 혼자 있게 된다면 어김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시원한 멍의 바다에 풍덩 빠지련다. 멍의 바다에 둥둥 뜬 채 안개 낀 흐린 밤하늘을 긴 시간동안 응시하여 별빛을 찾아내고, 별빛과 별빛을 이어 별자리, 인생의 지도를 그려나갈 것이다. 혹시 알겠는가, 저 별자리들 속에서 희망의 모양을 찾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