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하다는 축복

가타카 (1997)

by 이브와 아담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불확실성과 변수를 보완하며 삶을 발전시켜왔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의학, 기술, 사회체계, 문화의식, 도덕관념 등의 발달은 삶의 다양한 위험요소들을 가시적으로 줄여주었다. 평균 수명은 연장되었고 인권 신장을 위한 법과 제도는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여 사각지대를 채우면서 더욱 정밀해졌다. 비록 정밀해지는 과정 속에 혼돈과 모순이 있을지언정 그 역시 보완하려는 군중의 의지는 항상 존재했다. 우리는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그런 식으로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질서를 만들어왔다. 이루어질 수 없는 ‘완벽’이라는 희망을 기약하며.


그리고 여기, 기어코 완벽을 이루어낸 한 세계가 있다. 이곳의 유전학은 발전의 정점을 이루었고 과학자들은 DNA 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성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부모는 취향과 선호도를 고려하여 출산될 아이의 성향과 자질을 결정할 수 있었다.

폭력성, 우울증세, 평발 및 탈모 가능성, 소화장애 가능성 하향.

집중력, 판단력, 주도성, 언어 구사력, 친화력, 시력, 성장 가능성 향상.

이곳의 유전학은 태아의 열성인자 가능성을 낮추고 우성인자 가능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었다. 천 번 출산해도 이런 아이는 낳지 못한다는 솔깃한 문구와 함께, 부모의 선호도에 따라 인위적 수정이 가해진 과학의 아이는 무작위의 가능성 속에서 태어난 자연의 아이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주인공 빈센트는 자연의 아이였다. 과학의 아이로 태어나기엔 경제적으로 부족했을까, 아니면 사랑으로 빚어낸 아이는 어떨지 궁금했던 부모의 호기심이었을까. 빈센트의 부모는 빈센트를 자연의 아이, 그리고 빈센트의 동생 안톤을 과학의 아이로 출생시킨다. 안톤은 성장하면서 빈센트의 모든 면을 압도한다. 그렇게 안톤에게는 우성 인간, 빈센트에게는 열성 인간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사회는 종종 너무도 쉽게 개인에게 꼬리표를 부여한다. 그것이 질서를 정립하고 누군가를 신속하게 파악하기 위한 수렵채집 시절의 본능이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군중으로부터 낙인찍힌 낙인자는 결국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된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칼날은 울타리 밖으로 나오려는 낙인자를 위협한다. 그렇게 낙인자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가능성, 내면의 우주를 경험하지 못한 채 점점 고립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낙인자는 기어코 타인의 시선과 싸워 울타리 밖으로 나온다. 빈센트가 그랬다. 어떻게 된 일일까? 대체 그가 다른 낙인자들, 열성 인간들과 다른 점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꿈이었다. 빈센트에게는 꿈이 있었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으로 우주비행하기 위한 꿈. 그러나 우주 비행은 우성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분야였다. 그래서 빈센트는 불가능을 시도한다. 그 시도란, 바로 우성 인간 행세를 하는 것. 매일 아침 그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전신 제모를 하고 몸에 붙은 각질들을 없애는 등 스스로의 몸에 드러나는 열성 인자의 흔적들을 전부 제거한다. 마치 열성 인간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것처럼. 그리고 열성인자를 거를 목적으로 상시 DNA 검사를 실시하는 우주비행센터 가타카에 출입하기 위해, 그는 누군가와 협력한다.

제롬과 빈센트

그가 협력한 대상은 제롬. 우성인자의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꿈을 포기한 수영선수. 열성인자의 몸과 꿈을 가지고 있었던 빈센트와는 반대되는 인물인 제롬은 과거에 은메달을 목에 건 수영선수였다. 제롬은 언제나 금메달을 따고 싶어 했지만 수영 훈련 도중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되었고, 금메달을 향한 그의 꿈은 증발되었다. 제롬은 자신의 혈액과 체모 등 우성 인자들을 빈센트에게 팔고, 빈센트는 제롬으로 신분 위장을 한 채 우주비행센터 가타카에 들어가 고된 훈련과 위기들을 통과하고 예비 우주비행사가 된다.


세상은 우리가 정말로 꿈을 품을 수 있는 자들인지 끊임없이 시험한다. 우리가 경쟁에서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맞설 수 있는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에 도전할 용기가 있는지, 타인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역이용할 지혜가 있는지, 때로는 그 속임수를 용서할 아량이 있는지,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고 변화할 수 있는지, 자기혐오와 자괴감을 견뎌낼 수 있는지, 비난은 가볍게 무시하고 비판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지의 여부들을 시험한다. 마치 빈센트가 우주비행사가 되려는 과정 속에 수많은 역경이 있었던 것처럼.


그저 쉽게 이룰 수 있는 꿈이라면 그것은 꿈이 아닐 것이다. 꿈은 이루기 힘들기에, 우리가 겨우 상상만 할 수 있기에 꿈인 것이다. 어쩌면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의 힘겨운 정도가 그 꿈이 얼마나 가치 있는 꿈인지의 척도가 될 수 있을 테니,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도 숭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꿈을 품는다는 것은, 그것의 생동감만큼이나 무거운 두려움과 책임감 또한 끌어안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꿈은 없나 보다.

“빈센트,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 모든 걸 어떻게 한 거야? 우린 이제 돌아가야 해.”

“넌 알고 싶겠지. 난 되돌아갈 힘을 남기지 않아서 널 이기는 거야.”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고통을 견디는 만큼 우리의 마음 근육도 단단해질 것이기에, 우리는 꿈을 향해 더욱 추진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빈센트가 아침마다 자기 몸에 붙은 열성 인자들을 벗겨냈던 과정들이 그를 심적으로 각성시켰던 것처럼. 만약에 그가 마음속에 꿈을 품지 않았다면 그러한 추진력이 발현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를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은 결국 절박함이었다. 그리고 절박함의 씨앗은 결핍의 토양에서 더욱 잘 자라기에, 우리의 불완전한 부분들은 어쩌면 축복일 수도 있다. 그 결핍들이 결국 꿈으로 향하는 계단의 모든 한 칸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웃으며 우리의 불완전함을 안아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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