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

러브, 데스 + 로봇 Vol.2: 팝 스쿼드(2021)

by 이브와 아담

두꺼운 소설책보다 짧은 시 한 편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때가 있다. 소설은 주로 구체적이고 실험적이지만 시는 은유적이고 해석의 프레임이 넓다. 고심해서 툭 던져진 단어 하나는 누군가에겐 빨간색이 되고 누군가에겐 파란색이 되며, 또 누군가에겐 회색이 된다. 시적 언어들은 그렇게 카멜레온처럼 독자들의 색깔로 변해 마음 깊숙한 곳에 익숙하게 자리 잡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 입에서는 단어 하나가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인상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시적 언어들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시가 가지는 힘이다.


넷플릭스 콘텐츠를 앞에 두고 왜 소설, 시 타령이냐 싶을 것 같다. 글의 서두를 저렇게 시작한 이유는 내가 오늘 본 것이 한 편의 시이기 때문이다. 러브 데스 로봇은 한 편당 10분~20분 내외의 단편 애니메이션들로 이루어진 콘텐츠이다. 2시간 정도 상영하는 영화가 소설책이라면, 러브 데스 로봇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들을 미칠지 보여주는 일종의 시집이다. 주로 부정적인 영향들을 보여준다. 취향을 좀 탄다. 사랑, 죽음, 로봇이라는 이름의 이 특이한 시집은 지금까지 총 두 권 나왔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 [팝 스쿼드]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팝 스쿼드

이 단편 속 세계는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와 무척 흡사하다.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과학 기술은 어느새 마법이 되어 죽음의 문을 우스운 존재로 만들었다.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은 특정 기간마다 일명 ‘회춘 치료’를 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원할 때마다 젊어질 수 있다. 문명이 발생한 이래 인간은 때가 되면 항상 죽어왔고, 그들의 빈자리는 후손들이 채워왔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이 단편의 비전에 따르면 권력자들은 순순히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고, 후손들은 더 이상 사회에 발을 디디지 못할 것이다.

파티에서 아무도 안 나가면 사람을 계속 들일 수가 없지.


어느 경제학자는 말한다. 불평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며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처음에는 그 불평등을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등적인 보상이 주어지는 정도의 불평등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사뭇 절망적이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불평등했다. 우리가 용인할 수 있을 법한 불평등의 격차보다 더욱 큰 부의 양극화 현상이 전 세계에 드리워져 있었다. 불평등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중 소득 하위 40%가 차지하는 자본량은 자본 총량의 0.3%에 불과하다고 한다. 두 눈을 의심했다. 그렇다면 소득 상위 20%는 자본 총량에서 얼마만큼의 자본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86%였다.


더욱 슬픈 것은, 가난이 대물림될 수 있다는 속설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저소득층 자녀들은 아기 때부터 중산층 혹은 상류층 자녀들에 비해 뇌 활용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선천적인 신체적 차이가 아닌, 환경적 차이에 의해서. 또한 추수를 앞둔 농부들 400명을 대상으로 추수 전, 후 두 번의 지능검사를 실시한 결과 대부분 농부들이 추수 후에 지능검사 결과가 양호하게 나왔다.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뇌 활용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부 권력자들은 부와 명예, 권력과 함께하는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올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러한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치부와 욕망을 숨기기 위해, 경제적 인프라가 붕괴될 위험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포퓰리즘을 일삼고, 언론을 역이용해서 논점을 흐리게 하는 정도로 그치고 있지만 [팝 스쿼드]에 등장하는 미래의 권력자들은 더욱 잔혹하다. 과학 기술을 통해 ‘영생’을 손에 얻은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이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후손들을 몰살하기 시작한다. 출산 금지라는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팝 스쿼드] 속 사회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기적이 될 수 없었다.


이 단편 애니메이션은 우리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된다고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주인공 브리그스는 권력자들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후손들을 처리하는(제거하는) 임무를 가진 요원이다. 그의 동료들은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지만, 그는 종종 임무수행 간에 수전증과 환각 등의 불안 증세를 보이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깨닫는다. 자신의 불안이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죄책감의 정체를 알고 싶어했던 브리그스는 도시에서 떨어진 외곽지역, 가난한 후손들이 살아가는 마을에서 아이를 숨기고 살아가는 한 여성을 만나 묻는다. 왜 영생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아 위험한 상황을 자처하는지.

그러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같은 사람들은 왜 계속 아이를 낳는 것입니까?

왜냐고요?
자신한테만 몰입해서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요.

그럼 이건 사는 겁니까?
이런 누추한 곳에서, 그걸(아이) 가지고 위험에 떨며 살아가는 것이. 이런 건 잘될 리가 없다는 걸 아셔야죠.

회춘 치료를 받으며 218년을 살아왔어요. 너무나 많은 걸 봤죠.
하지만 이 아이 덕분에 모든 것이 새로워요. 이 아이의 작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게 좋아요. 너무나 밝고, 생기가 넘쳐요. 당신네들의 공허한 눈빛과는 다르죠.
아이의 첫 걸음마를 기억해요. 처음으로 저를 엄마라고 불렀을 때도 기억해요. 모든 순간을 기억해요. 저에겐 짧았던 시간이기에.

권력자들이 후손들을 제거하지 않았을 뿐, 우리 사회 역시 [팝 스쿼드] 속 사회와 닮아있다. 그들이 출산을 두려워하듯 우리나라 역시 일정 부분 출산을 두려워하는 저출산 국가이다. 올해 우리나라 출산율은 0.84%로, 유엔에서 조사한 198개의 나라 중 출산율 순위가 198위라고 한다. 고용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집값은 나날이 오르고 있다. 우리가 사회에서 발 디딜 수 있는 공간 역시 [팝 스쿼드] 속 세상과 마찬가지로 줄어들고 있다. 요즘은 청년 고독사 뉴스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막상 써놓고 보니 [팝 스쿼드] 속 사회나 우리나라 사회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 단편에는 ‘눈’이 자주 등장한다. 카메라는 눈을 자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인상적인 시적 언어는 두 개였다. 회춘 치료를 받는 성악가의 눈과 단편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브리그스의 눈. 회춘 치료를 받는 성악가의 눈은 마약을 할 때처럼 동공이 확장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사라져 가는 후손들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주입받는 것처럼. 그 들뜬 눈빛이 보여주는 것은 영원한 미래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기쁨과 흥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한정된 자원을 독차지하겠다는 ‘욕심’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하늘을 올려다보던 브리그스의 눈빛은 뭘 의미했을까. 후회의 눈빛이었을까, 구원을 바라는 눈빛이었을까. 어쩌면 포기의 눈빛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포기는 내가 알던 무기력함의 포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굳은 다짐이었다. 욕심을 내려놓고 다음 세대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자신들이 경험했던 세상을 그들도 경험하게 해주겠다는 다짐이었다. 회춘 치료를 받는 성악가의 눈빛이 생기 있었을지언정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왔던 눈빛은 브리그스의 눈빛이었다. 가끔은 시드는 것이, 떠나는 것이 더욱 아름다울 때가 있다.


브리그스의 눈 위에 떨어지던 빗물은 분명 그의 죄책감을 씻겨주었을 것이다. 그 역시 아이들의 생기가 주는 희망을 목격했기에. 욕심이 만들어낸 공허한 세상과 마음에 꽃을 심을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순진함과 낭만, 어리석음이 결국 잿빛 세상을 다양한 빛깔로 만들 수 있는 핵심 열쇠였다. 언젠가 세상의 주인이 될 모든 후손들을 위해서, 그들이 꽃을 심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우리는 때가 되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역할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차지할 세대들이 넘어지지 않고 균형잡을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자리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은 우리가 몰랐던 색깔들로 채워질 것이고, 그 생동감있는 변화를 목격하며 우리는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권력만으로는 맛보지 못했던 진정한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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