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D Jun 06. 2021

스물다섯 첫 자취방

스펙트럼과 시행착오

기록으로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글과 그림이라면, 시간으로 나를 표현하는 수단은 대화와 관계 맺기일 것이며, 공간으로 나를 표현하는 수단은 아마 방일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방을 혼자 써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항상 동생과 방을 썼고, 대학교 때는 룸메이트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덕분에 서로 맞춰가며 지내는 법을 일찍 터득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이를테면 동생에게 나의 청소방식을 강요했다던지. 동생은 눈에 보이는 먼지만 치우면 그만이었지만, 나는 책상이나 서랍, 침대 밑을 들어내서 그 안에 쌓인 먼지들까지 치워내야 성이 풀리곤 했다.


사실 경향성으로 보자면 깔끔한 방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어릴 적 함께 방을 쓸 때마다 동생에게 나의 생활방식, 청소방식이 정답인 양 충고를 빙자한 강요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충고나 조언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그 부분에 있어서 상대방에게 귀감을 얻을 정도의 성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런 만큼 조언이나 충고는 섣불리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함께 방을 쓰며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방을 지저분하게 쓰는 것이 정답이 아닌 것만큼 깨끗하게 쓰는 것도 정답이 아니며, 지나치게 깨끗함에 집착하다 보면 편집증적인 강박이 발현될 수 있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타인과 맞춰가며 살아가는 생활을 일찍부터 해왔던 덕에, 함께 지낼 수 있는 룸메이트의 스펙트럼이 꽤 넓었다. 깨끗함을 선호하는 룸메이트에게는 기꺼이 맞춰 깨끗할 수 있었고, 조금은 지저분하게 지내는 룸메이트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끔은 정리보다 당장의 휴식이 중요할 때가 있기에. 다만 화장실에서 흡연을 하거나, 악취가 심한 쓰레기들이 발 디딜 곳 없이 널브러져 있는 상황을 마주하면 정리를 부탁하거나 아님 내가 정리하거나, 도저히 그것도 안된다면 생활 반경을 구분해놓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심리적으로라도. 다만 이제는 상대방에게 정리정돈을 절대로 강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공간을 함께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리듬을 가진 삶들이 만나는 것이고, 그 어떤 리듬에도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만 가끔 부러울 뿐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방을 혼자 사용했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면 누군가의 방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프라모델이 전시되어 있었고, 누군가의 방에는 좋아하는 책들이 진열된 개성 있는 서재가 있었으며, 누군가의 방에는 좋아하는 영화나 가수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그들만의 방에서 풍기는 아우라와 비교했을 때, 내가 살았던 방이나 기숙사는 무척이나 평범하고 단출했다. 마냥 나의 취향대로 방을 꾸미기엔 동생이나 룸메이트의 선호도를 무시할 수 없었고, 그렇게 타협점을 찾은 방의 색은 조금은 퇴색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항상 그런 빛깔의 방에서 지내왔기에 크게 불만은 없었지만.


그러다 이틀 전, 전방 파견지에서 복귀하고 숙소를 이사하게 되었다. 보직이 바뀌면서 더 이상 부대 내 숙소에서 지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짐을 옮겼다. 부대 밖 숙소의 생활이 자유로운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방을 혼자 쓰게 된다는 것에 대한 설렘이 컸다. 온전히 나만의 공간을 가져보게 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한 경험이었기에. 마치 뜯어보지 못한 유년기의 선물을 지금 막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렇게 처음 접한 나의 공간은 대충 보기엔 깔끔했지만, 자세히 보니 구석구석 퇴적된 먼지들이 꽤 많았다. 가뜩이나 방의 벽지는 흰색, 바닥은 베이지색이라 한 번 신경 쓰고 나니 먼지가 눈에 더 잘 띄었다. 마치 마음속 충치를 제거하는 것처럼 먼지들을 닦아내고 방을 흰 도화지의 공간으로 만들었더니, 그 도화지에 어떻게 나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방을 청소할 줄만 알았지 꾸미는데 아무런 경험이 없던 나에게 남아있던 것은 당혹감뿐이었다. 나만의 무언가를 한 공간에 진열해 둔다는 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혼자 방을 써본 적이 없던 나는, 공간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줄 몰랐던 사람이었다.


누군가와 발걸음을 맞춘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의 속도를 잃는 것과도 같다. 어쩌면 난 스스로의 속도를 잃는 게 어색하지 않았을 정도로, 나만의 속도와 색깔이 없던 사람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 하나 자신있게 꾸미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독창적인 개성을 가지고 싶은(어쩌면 가지고 있는) 나는 어느새 그 개성을 바라보는 타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조차 두려워하는 평범한 잿빛의 존재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도화지의 방에서 내가 느낀 당혹감의 정체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이 방만큼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다. 타인의 시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처음 가져보는 나만의 개인적인 공간. 내가 느꼈던 당혹감은 내면의 결핍을 비추고, 나아갈 길을 제시해줄 수 있었다. 그 길은 아마 자기표현의 용기와,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이 방을 통해 ‘나’를 조금은 더 사랑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흰 도화지의 방에 나만의 색깔을 그려보는 것이 사뭇 두렵기도 하지만, 괜찮은 무늬를 잘 구상하고 배치해서 꾸며본다면 남들이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잘 정돈된 나의 마음과 생각의 공간을 누군가가 좋게 봐준다면, 나는 나를 사랑할 수많은 근거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만큼 든든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나의 색깔을 포기하고 얻게 된 타인과의 스펙트럼 역시 잃고 싶지 않다. 상대방과 발걸음을 맞추며 얻은 이해의 폭 역시 내 삶에 지대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타인과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스스로의 색깔을 흐리게 했다면, 이제는 그 상태에서 스스로의 색깔을 조금은 더 선명하게 만들고 싶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처럼, 나의 색깔을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에도 적지 않은 시행착오들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만해서 색깔의 배합을 잘못 맞춰 이상한 색깔이 탄생할 수도 있겠지. 그러면 다시 조율하면 된다. 힘들더라도 분명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분명 내 좁은 그릇을 넓혀보려는 시도 중 하나일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우리 내부의 결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