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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May 30. 2021

우리 내부의 결함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모든 사회체제에는 결함이 있었다. 역사를 간단히 되짚어 봤을 때, 사회주의에는 사유재산과 자유의 침해, 공산주의에는 이와 더불어 독재의 문제가 상존했다. 자본주의에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민주주의에는 정치적 전문성의 결여라는 문제가 있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체제는 계속해서 변화를 거쳐왔지만 그 과정 속에서 쿠데타, 세계 대전과 같은 테러와 전쟁들이 꽤 많이 발발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결함들은 체제를 구축하려는 ‘계획’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체제를 이끌어가는 주체인 ‘인간’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만약 인간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모두의 마음속에 내재되어있을 그 결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작가 윌리엄 골딩은 그 답을 얻기 위해 단순하지만 무서운 실험 하나를 진행한다.


배경은 핵전쟁이 발발한 위기상황. 한 떼의 영국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는 안전 장소를 향해 날아가던 중 미상의 적으로부터 요격을 받아 격추되고, 소년들은 비상 탈출하여 태평양 상 어느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다섯 살에서 열두 살 정도에 이르는 이 소년 집단은 이곳 무인도에서 그들만의 사회체제를 만들어간다. 처음에는 체제가 잘 유지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분열은 시작되었다. 사회체제의 간섭이 없는 그 외딴섬에서 소년들은 점점 문명인에서 야만인으로 변해갔다.


우리 사회에도 어린아이들로 이루어진 이러한 외딴섬이 존재한다. 바로 학교다. 물론 학교에서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사회화시키는 과정이 진행된다. 하지만 교사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교내 사각지대 또는 바깥 어딘가에서는 주로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야만성이 여지없이 드러나고는 한다.

“학교에서 부르던 방식으로만 날 부르지 않는다면 괜찮아.” 뚱뚱한 소년이 말했다.
“애들이 널 뭐라고 했길래?” 랠프가 물었다.
“애들이 날 돼지라 불렀어.”
뚱뚱한 소년은 소곤거렸다. 랠프는 깔깔 웃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돼지! 돼지!”
“랠프.. 제발!”
“돼지! 돼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돼지는 불안해서 두 손을 쥐었다. 랠프는 모래사장의 뜨거운 대기 속으로 춤추듯 뛰쳐나가더니, 전투기처럼 돌아와서 돼지에게 기관총을 쏘는 시늉을 하였다.
“따다다다다당!”
돼지는 마지못해 씽긋 웃었다. 이렇게라도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이 자기도 모르게 기뻤던 것이다.

사실 인간뿐만 아니라, 공룡시대부터 지금까지 모든 생명들은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힘의 서열에서 어느 위치에 속하는지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감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본능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회는 대부분의 약자들이 행복해질 수 없는 야생 정글이 될 것이었고, 다수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체제는 구축되었다. 학교에서는 그 체제가 약자를 괴롭히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교육의 형태로 나타났다.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영국 아이들도 그들 나름의 체제를 구축했다. 뚱뚱한 소년을 괴롭히던 랠프는 아이들을 통솔하는 리더가 되었고, 성가대 단장인 잭은 단원들과 함께 식량 확보를 위한 사냥팀을 결성했다. 이 소설에서 ‘돼지’라고 불리는 뚱뚱한 소년은 아이들의 놀림거리였지만 유창한 언변과 지식을 활용해 토의를 주도했고, 안경을 썼기 때문에 렌즈로 불을 지피는 역할을 담당했다.


리더 랠프는 항상 손에 소라를 들고 다녔다. 그가 소라로 고동을 불면, 무인도 내 모든 소년들은 랠프 앞에 집결해야 하는 규율이 생겼다. 소라는 권력과 규칙의 상징이었다. 잭은 사냥감들을 잡기 위해 위장 목적으로 검게 칠한 가면을 착용한다. 가면은 인간성을 잠시 없애는 본능의 상징이었다. ‘돼지’는 유식했고, 그의 안경은 불을 지필 수 있는 도구였다. 안경은 지식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문명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계획은 그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들은 봉화를 올려 무인도 주변을 지나는 함선들로부터 구조를 받아야 했지만, 당장의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봉화 올리는 작업을 소홀히 하고 사냥에 열중한다. 결국 함선은 아이들을 보지 못한 채 무인도 주변을 지나가고, 그렇게 불화는 시작된다. 잭은 자신의 사냥 실력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랠프는 봉화를 올리지 않은 사냥팀에 분노를 표출했다. 자존심에 생채기가 난 잭과 그의 무리들은 랠프를 떠났고, 잭은 본능에 충실한 그들만의 야만적인 공동체를 결성한다.


그들이 적합한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고 이성을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영국 소년들을 짐승으로 만든 것일까. 작가 윌리엄 골딩은 이 지점이 바로 인간 내부의 결함이며, 완벽해 보이던 사회체제가 결함을 보이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5살 소년 퍼시벌은 밤마다 어떤 짐승의 소리가 들려 쉬이 잠들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이에 랠프는 소라를 불어 회의를 소집하고, 퍼시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대체 짐승이 어디 있다는 거야? 짐승은 무슨 놈의 짐승이야!”
퍼시벌이 뭐라 중얼거렸다. 잭은 퍼시벌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나서, 목청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말했다.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대.”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랠프는 해안가를 돌아보았다. 모두들 그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망망하게 펼쳐져 있는 바닷물과 대양,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미지의 보랏빛을 생각했다.
“우리가 만사를 다 아는 건 아냐. 그렇잖아?”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사이먼은 멈칫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짐승이 있을지도 몰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 짐승들의 정체는 아마 우리들일지도 몰라.”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미지에 대한 두려움. 인간 본성의 결함은 바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체제를 통해 공고히 했던 인간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가능성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랠프는 무인도에서 구출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고, 잭은 자신의 사냥 실력을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돼지’는 무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두려움은 목표를 앞에 두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고, 소용없는 자존심 경쟁을 하게 만들고, 통찰력을 무디게 만드는 것의 근본적인 원인이자 우리 마음속에 내재된 결함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폭력성으로 똘똘 뭉친다.


잭이 자신만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돼지’의 안경(불, 지식)을 빼앗는 과정에서 안경은 깨진다. 체제 유지를 위한 지식과 이성은 종종 폭력적인 본능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마치 어느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법을 바꾸고 수정하는 것처럼. 혹은 국력 과시, 경제적 이익을 위해 지식인들의 경고를 무시한 채 전쟁을 일으키는 어느 나라처럼. 또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권력을 이용해 무고한 자들을 숙청시키는 누군가처럼. 결국 마음속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폭력성’이 사회체제에 내재된 결함의 원인이었다.

사이먼의 전면에는 ‘파리대왕’이 막대기에 매달려 씽긋거리고 있었다.
“넌 그걸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되어버렸는가 하면, 전부 내 탓인 거야.”

랠프와 ‘돼지’는 안경(불, 지식)을 되찾기 위해 잭의 은거지로 향한다. 잭 일당은 이미 야만인이 되어 있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그들의 광기는 이미 소년 몇몇을 살해한 후였다. 랠프와 ‘돼지’는 자신들을 죽이려는 잭 일당을 피해 수풀이 우거진 무인도 어딘가에 숨는다. 그러자 잭 일당은 그들을 찾기 위해 수풀을 태우기 시작하고, 결국 무인도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다.


화염에 휩싸인 무인도는 거대한 봉화가 된다. 불을 피해 도망치던 랠프는 제복을 입은 해군 장교와 마주친다. 인근 함선이 무인도에 피어오르는 거대한 연기를 보고 찾아온 것이다. 해군 장교는 피투성이가 된 랠프와, 가면을 쓰고 온 몸에 숯을 칠한 채 날카로운 창으로 무장한 잭 일당들을 본다.

“재미있는 놀이를 했군.” 장교는 말하였다.
“영국의 소년들이라면, 너희들.. 전부 영국 사람이니? 이것보다는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내 말은...”
“처음엔 그랬어요.” 랠프가 말하였다.
“처음엔 합심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랠프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죽은 나무처럼 시들어진 섬이 랠프의 시야에 들어왔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메어 울었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흐느꼈다.

소년들의 울음소리에 둘러싸인 장교는 약간 난처해했다. 그는 그들이 기운을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외면을 하였다. 바다 저 멀리에서 순양함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교는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저 흐느끼고 있는 소년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 역시 우주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지구’라는 무인도에서, 그저 미지의 두려움 때문에 폭력성을 발산하며 전쟁이라는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들이 불(지식)로 섬을 태워 식량과 터전을 한 줌의 재로 만든 것처럼, 과학 기술이 언젠가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어 지구를 한 줌의 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체제를 다시 마주하자 상실된 인간성이 떠올라 서럽게 울기 시작했던 영국 아이들처럼, 그도 언젠가는 그렇게 구원받을 날이 올까. 우리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폭력성으로 인해 상실된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서 마주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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