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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Jul 06. 2021

찰나의 아름다운, 소멸의 세상 (2)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이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에이, 급하면 빨리 가야지. 지름길을 찾고, 속도를 높여야지.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주는 의미를 온몸으로 깨달았다.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이번 휴가를 기회로 대학교 친구들과 3박 4일 여행을 갔다. 중간에 등산을 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그곳은 코로나로 인해 특정 시간대마다 등산 인원수를 제한하고 있었다. 우리는 날이 더워지기 전 아침 일찍 등산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우리는 당일 조금 늦게 출발하게 되었고, 촉박한 시간은 우리에게 정신없이 액셀을 밟으라고 재촉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도로에 차량이 별로 없었다. 운전대를 잡던 친구는 6년 전 면허를 딴 이후로 한 번의 사고도 낸 적이 없었다. 도로는 깨끗했고 비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조건들은 우리가 안전할 거라는 절대적인 보장이 될 수 없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난 뒷좌석에서 안전벨트도 매지 않은 채 커피를 홀짝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인지의 속도보다 빨랐던 충격파. 쾅 소리에 놀라기도 전에 앞 좌석 시트에 코를 박았다. 와중에 내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는데, 부딪힌 상대방 차량은 유리 파편들을 흩날리며 공중에 붕 떴다. 그렇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커피. 차 시트에 왕창 쏟았네. 뚝. 뚝. 아니, 피구나.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피는 차에 쏟은 커피와 섞여 요상한 색을 만들었다. 그 색에 현기증을 느끼며 감각을 외부로 확장시킨다. 앞 좌석에 앉아있던 친구는 안전벨트에 배를 압박당했는지 도로에 누워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친구는 가장 침착하게 우리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상대방 차량으로 향했다. 우리가 렌트한 차량은 중차였고 상대방 차량은 경차였다. 그 차에는 어르신이 타고 계셨다.


난 흐르는 피를 막기 위해 코를 움켜쥐고, 어르신이 계신 곳으로 향했다. 후덜거리는 다리와 두려운 마음을 질질 끌며. 밖에 나와서 보니 우리 차 범퍼는 전면이 박살난 상태였고 상대방 차량의 우측 옆면은 우리 차 범퍼의 모양대로 움푹 패여 있었다. 도로에는 사고의 파편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우리를 질책하고 있었다. 너네가 뭔 짓을 했는지 보라고. 운전대를 잡던 친구는 걸어오는 나를 보더니 딴 데 가서 앉아 있으라고 고함을 친다. 아씨, 뭘 잘했다고 큰소리지,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친구의 표정을 보고 이내 생각을 고쳐먹는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얼마나 미안했을까. 일단 발길을 돌려 앉을 터를 찾는다.


보험사가 도착하니 상황이 안정된다. 보험사는 마치 사고를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능숙한 솜씨로 우리의 실수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이가 흘린 음식물을 닦아주는 아빠처럼, 까진 무릎에 밴드를 붙여주는 엄마처럼. 보험사는 당황한 우리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몇 가지 서류를 건네더니 순식간에 현장을 정리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우리는 뚜벅이가 된 신세를 한탄하며 그날의 여행 계획을 병원 진료로 대체했다.


사실 나는 계획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계획 없이 사람 만나는 걸 더 좋아하고, 미리 검색해서 찾아가는 장소보단 발걸음이 닿는 대로 발견한 장소들에 더 애착을 가지는 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살아오면서, 특히나 이번 여행에서 난 계획이 주는 안정감과 효율성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효율성에 눈이 멀어, 마음을 조급함의 끈으로 졸라매었다. 계획의 완벽함을 위해서.


사고를 당하며 생각해본다. 원래 이렇게 지름길을 찾고 속도를 올리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가끔은 빙빙 돌아가는 길목에 더 멋진 경치가 있음을 알던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난 효율을 신봉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계획에 함몰되어 있었다. 그것만이 가장 효율적인 정답이라 생각한 채. 하나가 틀어지면 모든 게 무너질 거라 생각한 채.


차라리 좀 늦게 등산을 가기로 일정을 변경했더라면 그날 하루가 더 수월하고 여유로웠을 텐데. 우린 왜 그리도 빨리 정상에 오르고 싶어 했을까. 좀 더 여유를 가졌다면 천천히 주변의 경치를 즐기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여행을 만끽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더 멋진 여행길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효율적이지 않은 것들을 대체로 낭비라 여기는 우리 사회를 떠올려본다. 너무도 빨리 움직이고 급변하는 이 사회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그 사회의 사상을 내재하게 된 나의 사고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당한 사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진정하고 좀 더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우연은 반드시 발생한다. 우연은 삶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지만, 때로는 교통사고처럼 소중한 것들을 파괴하기도 한다. 우연이 가진 힘은 무척이나 강력해서 그 어떤 꼼꼼한 사람이 통제하는 계획조차 무너뜨릴 수 있다. 어차피 계획은 하나의 길이지만, 우연은 무궁무진한 길이기 때문에. 우연은 너무나 넓고 다양해서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조급함의 끈으로 인해 좁아진 마음을 다시 확장하고자 한다. 그 안에 우연과 혼돈이 깃들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면, 차라리 받아들이고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완벽한 계획 따윈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 덜렁거리는 나사를 무심코 지나치지 않기 위해. 찰나의 아름다운, 소멸의 세상을 지켜내기 위해. 다행히 어르신이 다친 곳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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