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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Aug 28. 2021

너는 내 삶의 이유

전갈의 아이- 낸시 파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여럿이서 힘을 합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서로 다른 우리는 추구하는 목표와 성향도 달랐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양보할 필요가 있었고, 삶의 중요한 한 부분 속에서 상대방을 위해 내 가치관을 일보 후퇴한다는 것은 꽤나 큰 손해라고 생각했다.


사회악이라 하면 누가 떠오를까? 거짓말로 군중을 선동하는 정치인이나 용서치 못할 범죄를 저지르는 공인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현대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회악이라면 교묘하게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우리를 우물이라는 좁은 세상 속에 가두는 사람일 것이다. 공산주의 집권자들이 그랬고, 가스 라이팅을 시전하는 동반자들이 그랬고, 광고를 교묘히 이용하는 개발자들이 그랬다. 감각의 둔화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부작용이기에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사회악이자 필요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에는 최악의 사회악이 등장한다. 바로 마약왕 엘 파트론. 내적 감각을 확장시키는 대가로 현실 감각을 둔화시키는 마약을 통해 엘 파트론은 거금을 벌어들였고, 특유의 공격성과 카리스마를 통해 탐욕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해소시켰다. 미국과 멕시코 정부조차 그의 경제력에 눌려 마약 사업에 함부로 제재를 가할 수 없었다.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모종의 기술을 활용하여, 그의 돈을 따라온 사람들의 머릿속에 칩을 심어 자유의지를 상실한 노예로 만들었고, 퇴화된 장기를 교체해가며 숨을 연명했다. 영원히 살기 위해.


엘 파트론의 노예들은 ‘eejit’이라 불렸는데, 그들은 양귀비 씨방에서 나오는 진액을 말려 아편을 생산해야 했다. 쉬라는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노동을 멈출 수 없었다. 일을 하라는 행동값이 칩에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엘 파트론의 양귀비 밭에는 노예들의 시체들이 넘쳐났다. 머릿속에 칩이 이식되어 있는 한 그들은 고통이라는 본능조차 느낄 수 없었고, 그들은 스스로가 깨닫기도 전에 죽음의 강으로 향했다.


엘 파트론은 낡은 장기와 신체 일부분을 교체하기 위해 복제 인간을 생성했고, 그의 의도에 따라 칩을 이식하지 않게 된 엘 파트론의 복제인간 ‘마트’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지구 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과 유전 정보가 100% 동일한 마트는 엘 파트론을 혐오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세상에서 자신과 가장 비슷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의 엘 파트론이 만들어진 배경에 불우하고 폭력적인 가정환경이 있던 반면에, 다행히도 마트의 주변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있었다. 덕분에 그는 엘 파트론과는 다른 선한 심성을 내재할 수 있었다. 마치 엘 파트론에게서 발현되지 못했던 음악적 재능이 마트에게 꽃 피웠던 것처럼.


하지만 마트 역시 선량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복제인간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스스럼없이 이빨을 드러냈고, 마리아에게 강제적으로 사랑을 확인받으려는 등 그에게도 엘 파트론과 같은 탐욕적인 성향이 내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를 옳은 길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미 비다’(나의 생명) 라는 애칭으로 그를 보듬어 준 어머니 같은 존재 셀리아와, 엘 파트론을 보좌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잘못을 속죄하며 살아가는 탬 린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존재는 개인의 자아를 대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 같다. 누군가를 곁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마트가 될 수 있고, 탐욕에 잠식된 엘 파트론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람들을 곁에 둬야만 한다. 우리가 원하는 영향을 받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이 삶에서 의미를 찾고 생(生)의 불씨를 키울 수 있도록.

나는 살 자격이 있다. 나는 그토록 우연히 주어진 이 삶에 빚이 있고, 그래서 만약 죽어야 한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복제인간이라는 이유로 마트는 모두의 증오를 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엘 파트론의 제국에서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짐승 취급을 받았고, 그곳에서 탈출해 마리아가 있는 아즈틀란으로 향할 땐 파수꾼들에게 붙잡혀 불법 새우잡이 어선의 노예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수꾼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도, 고래 시체들이 즐비한 뼈 무덤 속에 파묻혔을 때도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뜻을 함께했던 친구들 덕분이었다. 마트는 친구의 목숨을 걱정하는 것을 동력 삼아 스스로의 목숨을 붙잡을 정신력을 길렀고, 지금의 그를 만들어준 모든 사람들을 그리움 삼아 파수꾼들을 제압할 힘을 키웠다.


고난이 개인을 성장시킨다면, 그 무거운 짐을 계속해서 들고 있어야 할 텐데 우리는 때로 그 짐이 너무도 무거워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마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고난을 견딜 수 없다면, 그걸 껴안는 방법을 달리 해보자고.

마트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죽음을 축하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들의 일부니까.”
콘수엘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할머니는 해골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고 했어. 왜냐하면 우리가 몸속에 그걸 넣어 가지고 돌아다니기 때문이래. 그러니까 자기 몸속의 갈비뼈를 만지면서 그것과 친구가 되래.”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홀로 존재할 줄 알아야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선과 악이 공존하는 내면의 혼돈을 잘 다룰 정도로 나는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 그런 면에 있어서 난 독을 몸속에 머금고도 잘만 살아가는 전갈보다 못하다. 내면의 악을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은 내 힘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타인의 존재였다. 나보다 날 더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인 타인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인 타인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변화의 동력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내면의 독을 잘 다스리는 전갈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증명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미 비다’가 될 수 있도록.

넌 할 수 있어. 탬 린이 모닥불 너머 어둠 속에서 말했다.
‘나도 알아.’
마트가 그를 향해 마주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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