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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Sep 05. 2021

땅 보고 걸어도 괜찮으니까

가끔 하늘을 보기 버거울 때가 있다. 비를 머금은 먹구름은 사라지고 날씨는 결국 쨍쨍해지지만, 날씨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 기분은 아직도 우울. 세상의 틀에 맞게 자신의 모양을 조각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마주하는 타인의 시선과 언어들은 종종 따가워서, 마음에는 자괴감이라는 상처가 남는다.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을까. 왜 이리도 자주 미끄러질까. 맑은 날씨 속 다른 사람들은 전부 밝아 보이는데, 왜 나만 이리도 어두울까. 화창한 날씨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며, 나는 푹 고개를 숙인다.


누군가가 나의 약점을 찾았다며 실실거린다. 약점이 너무도 많은 나는 속으로 뜨끔하며 되묻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너 지금 와서 보니까 은근 거북목이네. 아, 나는 부러 호탕하게 웃어 보이며 인정한다. 허리 꼿꼿이 펴라는 엄마의 n년차 잔소리 덕분에 거북목인 상태로 몸이 굳진 않았지만, 좀만 긴장을 늦추면 바로 고개가 앞으로 나온다. 습관이 무섭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본다. 뭐가 그리 급한지 내 얼굴은 가슴팍 한참 앞에 나와있다. 으, 턱을 잡고 찡그린 얼굴을 최대한 뒤로 밀어버린다. 우두둑, 교정이 되길 바라며.


엎드려서 휴대폰 하거나 책상 앞에 앉아있는 자세가 이상하기 때문이겠지. 우리 ‘현대인’들이 가장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은 검은 화면이니까. 검은 화면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 골라서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거북목은 검은 화면을 숭배하는 우리들의 열정을 상징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지금의 거북목을 만든 또 다른 이유가 내게는 있다. 그건 바로 땅 보고 걷는 습관. 자존감 낮은 아이를 다룬 기사나 책을 읽을 때 심심찮게 나오는 ‘땅 보며 걷는 아이의 그림’을 떠올려본다. 내가 자존감이 낮은 것일까, 딱히 부정하진 않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 오고 나서, 잘나고 여유가 넘치는 애들 사이에서 자주 기죽곤 했으니까.


서울에서 아이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엄마의 신념 하나로 우리 가족은 기회가 되자마자 부단히 이사 준비를 시작했지만, 결국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울었다. 함께했던 친구들과 이별하기 싫어서. 해질녘까지 동생과 놀이터에서 놀던 추억을 그리움으로 남기기 싫어서. 난 그저 이대로가 좋았는데. 그 당시의 햇살과 공기가 마음에 들었는데.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그건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기로 한다. 당신의 모든 결정이 우리들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갑작스레 마주한 유년의 끝에서 내 작은 세계가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나 대신 망치를 들고 날 감싸고 있던 알을 깨 더 큰 세상을 보게 해 주었으니까. 그래서 난 여전히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의 그 결정이 결국 내게 유익한 영향으로 다가오지 못했을지라도.


육군 사관후보생 시절 유난히 추웠던 어느 날, 훈련으로 경험했던 첫 행군을 떠올려본다. 지지리도 무거운 군장은 내 어깨를 짓눌렀고, 입김은 얼굴을 타고 올라와 눈썹을 얼렸다. 대열 옆에서 우리와 함께 걷던 훈육관님이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 “고개 숙이지 마라!” 나중에 대열을 이끌어야 할 녀석들이 패잔병처럼 걸으면 되겠냐고, 훈육관님은 대열 이곳저곳을 누비며 으르릉거리셨다. 하지만 그날은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들었다. 목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져 있는 앞길을 보는 게 두려워서.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때로 버겁기도 하기에.


그래서 땅만 보고 걸었다. 보이지도 않는 도착점을 찾기보단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끝없이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아득한 경로를 상상하기보다, 지금 내 앞의 한 걸음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고 있는지, 팔자걸음을 하고 있진 않은지, 한쪽 무릎이 후덜거린다 싶으면 다른 쪽 무릎에 무게를 실어 걷기도 하고, 여유가 될 때는 내 걸음이 옆사람과 속도를 맞추고 있는지 확인도 해 가면서.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난 꽤 멀리까지 와 있었다. ‘언제까지 걸어야 하나’ 보다는, ‘벌써 여기까지 왔네’가 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할 수 있는 일들을 온전히 해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나의 걸음마 연습은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


영아기의 걸음마 연습이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 내 걸음마 연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무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건 책임감이기도, 희생이기도, 효도이기도, 인내심이기도, 노련함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내가 이 무게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걸 성공이라 부른다면, 나는 성공이란 걸 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런 궁극적인 성공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세상의 모든 부모 앞에서, 모든 스승 앞에서 그 자유로움이 곧 성공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성공만을 찾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 종착점을 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설정해야 할 삶의 목표는 ‘성공하는 것’이 아닌 ‘견디는 것’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무게를 짊어지고 인생이라는 가리워진 길의 끝으로 가려면, 견디는 방법밖에는 없으니까. 그것이 바로 지금 내 걸음마 연습의 의미.


화창한 날씨 아래 우울의 짐을 짊어진 채, 고개를 숙이며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땅 보고 걸어도 괜찮으니까, 포기만 하지 말자고. 왜냐하면 우리는 견디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 하늘을 보며 자만하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같이 땅을 보며 세상을 배우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자존감 낮은 게 아니라 겸손한 것이니, 고개 숙여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꽤 멀리까지 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벌써 여기까지 온 것처럼.


그래도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 보는 일이 있기를. 더 큰 세상을 보며 기대에 부풀고, 서로의 언 눈썹을 보고 웃으며 힘을 얻기도 하기를. 무엇보다도 현실에 잠식되어 거북목이 될 수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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