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t Reznor- Epiphany
데이비드 보위(1947~2016)를 좋아한다. 확신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던 내게 그의 음악적 행보는 동경 그 자체였다. 탁월한 음악적 감각으로 대중의 취향을 주도하던 그는 어렵게 형성한 자신의 페르소나를 기꺼이 찢어버리며 변화를 추구하곤 했다. 그는 성공의 그림자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바꾸며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었다. 음악적 변화에 대한 그의 선택은 단호했고, 비전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때로는 그의 과격한 변화에 등을 돌리는 대중들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자양분 삼아 대중음악계에서 성장해온 사람이 바로 내가 느꼈던 데이비드 보위였다. 그의 삶은 마치 하나의 재즈였다. 거대한 삶의 흐름 속에 선택과 확신이라는 음표들이 멋지게 배열되어 있던 하나의 재즈. 그의 마지막 앨범 <Blackstar>를 함께 작업했던 한 음악가는 말했다. 그의 음악에는 항상 재즈적 요소가 깃들어 있었다고. 그 스스로는 분명 몰랐겠지만.
그의 커리어 중에서도 특히 내가 좋아하던 파트가 있었는데, 바로 1994년에 나온 앨범 <Outside>가 발매된 시기였다. (추천곡: Strangers when we meet, The hearts filthy lesson) 동료나 후배 음악가들에게서 음악적 영감을 얻곤 했던 데이비드 보위는 이 시기에 한 신인가수에게서 큰 영감을 얻었는데, 그렇게 형성된 영감은 나중에 그의 후기 음악적 행로를 결정지은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신인가수가 바로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아티스트, 트렌트 레즈너다.
지금은 거의 단독으로 활동하며 차분하고 조용한 뉴에이지 음악을 하는 트렌트 레즈너 이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폭력적인 성향의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다. Nine inch nails라는 밴드의 리더로 활동하며 시끄럽고 불쾌한 사운드로 작곡한 음악들은 꽤나 자기 파괴적이었다. 음반사와의 잦은 마찰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가 당시 음악적 색깔에 크게 반영되었다고 하는데, 지직거리는 금속성 잡음 속에서 울부짖던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관하고 내면의 어둠을 과감하게 전시했으며,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가사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건 대중들에게 제대로 먹혔다. 이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파괴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짊어진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싶은 욕구, 규정된 세계에서 참아왔던 본능들을 표출하고 싶은 욕구, 세상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을 향한 길 잃은 분노. 트렌트 레즈너는 음악과 혼연일체가 되어 그렇게 사회와 무의식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예술적으로 표현해냈다.
트렌트 레즈너의 곡 <Epiphany>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의 사운드트랙이다. 지옥의 불구덩이 같은 음악을 연주하던 사람이 가족영화의 음악을 작곡하는 게 독특해 보이긴 하지만, 막상 음악은 그 독특함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차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와 조용한 앰비언트 사운드만으로 채워진 곡 Epiphany는 다분히 트렌트 레즈너스럽다. 그의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는 이런 조용한 음악 속에도 초창기 시절의 어둠을 드리워놓고 있으며, 느리고 조용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 속에는 어둠 속 그의 의식과 우리의 의식을 위로해주는 세심한 터치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의 커리어를 쭉 살펴보면 알 수 있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음악 스타일이 계속 차분해져 왔다는 것이다. 음악이 의식의 반영이라면 그는 의식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음악을 선택했던 것 같다. 그 조용한 피아노 선율 속에는 분명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어떠한 음악적 기교 없이 단순한 음들의 배열로 이루어진 선율 속에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걸어갈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Trent Reznor- Looking Forwards and Backwards.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트렌트 레즈너의 곡.)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실제로 트렌트 레즈너는 더 이상 대부분의 음악에 가사를 넣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세상과 소통하는 그의 방식은 이미 언어적 장벽을 초월했다.
영화 [소울]에는 마치 과거의 트렌트 레즈너처럼 스스로를 자해하던 인물이 나온다. 꼭 물리적 자해만이 자해가 아니다.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생각도 자해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이 휴식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규정짓는 것,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마약과 우울증에 빠지는 것. 우리의 생각은 얼마나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까. 걱정하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걱정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걱정하는 게 익숙해졌구나. 자해가 편한 사람이 되었구나.
영화 속 대사처럼, 목적이 있는 삶은 중요하다. 그건 우리를 움직이는 강한 불꽃이자 동력이기 때문에. 하지만 태양의 빛에 가려진 별들의 아름다움을 잊으면 안 된다. 목적이 일상의 행복을 잠식하는 순간, 걱정이라는 자해는 시작된다. 그러니 별들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잡히지 않는 것이 우릴 살아가게 하니까.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는 우리의 힘을 여전히 믿으니까. 그렇게 걱정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선택과 확신으로 매 순간 새롭게 선율을 창조하는, 마치 재즈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