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를 만드는 작은 선의

스위트홈(2020)

by 이브와 아담
어, 가장 짙은 어둠도 가장 흐린 빛에 사라지는 거래요.
-스위트홈 ‘지수’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고 이기기 위해 비열함을 드러내고 경쟁하는 모습 속에서 심성이 유약하고 나약한 사람들은 쉽사리 절망의 나락으로 빠진다. 사회적 규범과 약육강식의 법칙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은 혼란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비관하게 된다. 그렇게 학교폭력 피해, 집단 내 따돌림, 상실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 채 자살로 도피하고자 한다. [스위트홈]의 현수 역시 자신이 행했던 모든 선행들이 폭력과 절망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삶을 비관하게 된다. 그를 환영하고 있던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었고 그는 집행유예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자살 날짜를 설정해 놓고 목적없이 살아간다. 매일 밤마다 내일을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위트홈]은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보여준다.


현수의 삶에 짙게 드리워진 어둠은 그의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한다.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이 ‘괴물화’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처음엔 이 드라마에 관심이 없었다. 단순히 오락용 슬래셔 공포물인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물의 설정을 보고 관심이 생겨 바로 시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단순히 질병에 걸려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억압된 욕망을 바탕으로 괴물이 된다. 하지만 특수감염인이라고 하여 보름이라는 골든타임을 잘 넘기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진화한 인류가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금지된 욕망을 억압하며 살아가고 있는 잠재적 괴물이다. 그걸 표출하여 인간이기를 포기하거나 욕망을 잘 다스려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욕망이 반영된 괴물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인간일때 탈모였던 털북숭이 괴물, 성공적인 삶을 위해 배고픔을 억누르며 살아갔던 식탐 괴물 등 억압된 욕망에 집착하여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눈에 충분히 괴물처럼 비춰질 수 있다. 우리의 세상도 관점만 달리해서 보면 성경 속 죄악의 도시인 소돔과 다르지 않다.

[스위트홈]에는 절망을 앞에 두고 반응하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제시된다. 재난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는 끊임없이 타인을 의심하고 다른 누군가는 근거가 부족해도 타인을 믿는다. 드라마에서 ‘지수’라는 캐릭터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아무리 믿음직스러운 상황일지라도 타인에 대한 의심을 쉽사리 떨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겉으로 티내진 않겠지만. 하지만 가끔은 믿음의 도약이 필요할 때가 있다. 서로에 대한 온전한 믿음만이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충수염 수술을 앞두고 지수와 재헌이 돌잡이 때 뭐 잡았는지 대화하는 장면이다. 지수는 자신이 실을 잡았다고 거짓말한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수술 앞에서 그녀는 수술 경험이 전무한 은혁을 온전히 믿고 자신이 돌잡이때 실을 잡았다며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죽음의 두려움을 믿음의 연대로 견뎌낸 것이다.


주인공 현수가 흉측한 괴물이 되지 않고 골든타임을 잘 넘겨 진화한 인간이 된 것에는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컸다. 세상과 연을 끊고 자살하겠다는 그의 자기파괴적 욕구는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선의의 마음가짐으로 순화될 수 있었다. 아무리 살기 힘든 삶이라도, 아무리 살기 힘든 세상일지라도 선의의 행동은 지옥을 조금은 아름답게, 있고싶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힘들수록 더욱 선의를 행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 우리를 괴물로 만들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세상이니까, 살아남았으니까 더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스위트홈 ‘유리’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사람들, 강한 힘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마구 사람을 죽이는 의명이에게 화가 난 현수는 그동안 꼭꼭 억압시켜놓았던 파괴적 욕구를 분출한다. 그의 상황을 안타까워했던 두식이 아저씨는 괴물화가 진행되는 현수의 몸에 돋은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감내하며 그를 꼭 안은 뒤 이 한마디를 내뱉는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자 고슴도치처럼 날 서 있던 현수의 가시가 서서히 사라진다. 우리는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나 역시 그렇다.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을 핑계로 바쁘고 정신적으로 힘든 스스로의 삶은 지나치게 연민하며 타인에게는 지나치게 관심이 없다. 물론 타인이 지옥일 때가 있다. ‘날씨가 맑다’는 이유로 현수를 집단폭행한 고등학교 동창들처럼. 하지만 자살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타인의 관심이다. 실제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내가 너의 얘기를 들어줄게’ 이 말 한마디만으로도 자살을 멈출 확률이 높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 자살률 OECD 국가 중 1위’ 이 타이틀은 고단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지표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타인에게 무심한지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 주변 사람들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서 하는 말이지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약하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얕보는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이다. 인생 별거 없다고 애써 쿨한 척하며 타인의 고통의 깊이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교만이라는 욕구에 빠진 괴물들이다. 가장 짙은 어둠도 가장 흐린 빛에 사라질 수 있다는 지수의 말처럼 우리의 작디 작은 선의는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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