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과 선배한테 연락이 한 통 왔다. 보통 연락이 오면 반가울 때가 있고 불안할 때가 있는데 이번 건 불안한 축에 속했다. 전혀 친분이 없고 평소에 연락하던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돈빌려달라는 연락일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폰테크 사기를 당했는데 일이 커져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상황이었고 다음주까지 돈을 갚지 않으면 대부업체와의 계약서에 서명한 지인들에게로 연락이 간다는 것이었다. 몇달 전부터 경찰서 조사를 받은 상태이고 빚을 갚기 위해 6달동안 일용직 알바를 뛰었지만 기일까지 청산하기는 무리, 형 부모님도 포기하신 상황이라고 거의 울먹이듯이 사연을 얘기했다. 이러면 안되지만 사실 혼란스러웠다. 빌려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정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딘 스스로를 원망하며 나는 어떻게 거절할지 핑계를 찾기 위해 생각 좀 해보고 연락 주겠다고 얘기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군 복무하며 돈을 벌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단칼에 거절하기엔 스스로가 냉혹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게 정리된 지금 난 이 형 앞에서 더욱 냉혹해지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는다.
일단 이 형과 통화가 끝난 직후 가장 먼저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거절하느냐였다. 몇 달 전부터 힘든 상황이었다면서 연락 한번 없다가 이렇게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 무례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도 버는 사람이 인색하다는 소리를 듣는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이 형을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줄 열쇠가 우연히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친하지 않던 사람이었기에 별로 기쁘진 않았지만.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던 나는 혼란에 빠졌고 이를 명쾌히 해결해줄 사람 어디 없나 연락처를 뒤져봤다. 그리고 나와 같은 대학을 나오고 비슷한 인생을 산, 인생 4년차 선배 친누나한테 전화를 했다. 사실 형이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한테 전화해서 퍼트리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미안하지만 형 못지않게 나도 손해보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조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돈 버는 것도 처음이고 이런 부탁받아보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누나는 잠에 깬지 얼마 안된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연락을 받았고 나는 차분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누나가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그 형이 과탑이었냐는 것이었다. 마치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 때 ‘걔들 성적은 잘나오니?’ 라고 항상 물어보셨던 아버지처럼. 어릴 땐 성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려는 아버지가 무척이나 싫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물어보는 누나의 의중이 너무나도 파악이 갔고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아버지와 누나가 궁금해했던 것은 내 어릴적 친구들이나 그 형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지의 여부였다. 그 형이 성적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난 있는 사실 그대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얘기가 나오자마자 누나는 절대 돈 빌려주지 말라고 얘기해줬다. 그리고 변명도 하지 말라고, 모든 행동을 꼭 설명해줄 필요도 없으며 모두에게 이해받으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조언해줬다. 옆에 있던 매형도 돈 빌려줄거면 돌려받지 못할 거란 각오를 하고 주던가 아니면 아예 주지 말라고 충고해줬다.
통화가 끝난 직후 나와 같이 장교로 군 복무를 하고 있는 과 동기에게 연락을 했다. 나랑 비슷한 상황이라 아마 얘한테도 연락이 왔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얘한테는 한달 전에 연락이 왔고 이 친구는 카톡마저 씹었다고 한다. ‘그럴 땐 돈 없다고 얘기해야돼. 그게 국룰이야. 가족도 친한 사람도 아닌데 연락 없다가 다급하니까 다짜고짜 연락해서 돈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야. 내가 돈빌려달라 해도 넌 빌려주면 안돼.’ 명확하게 얘기해줬다.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명확히 정리해준 누나, 매형, 친구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아버지와 누나가 강조했던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이 형이 그런 사람이라 묻는다면 미안하지만 동의하긴 힘들겠다. 통화 내용을 상기해보니 이 형은 은행 대출도 불가한 상황이었고 부모님마저 등을 돌렸기 때문에 분명 그동안 충분한 기회가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든건 당연지사, 그리고 사기를 당했으면 경찰서에 고소하는 것이 먼저지 대부업체 협박을 먼저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말하지 않은 뭔가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 못한 안일함이던, 해당 대부업체를 냉큼 믿어버린 자만심이던 그건 형이 짊어져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먼저, 이걸 책임질 만큼 내가 그 형을 좋아하지 않는다.
p.s. 11시 즈음 형한테 생각해봤냐는 카톡이 왔고, 연락을 받지도 말고 연락처를 차단하라는 누나와 친구의 충고와는 달리 있는 그대로의 내 생각을 답장했다. 어렵더라도 책임질 수 있는 더 나은 길을 찾길 바란다고. 형은 고맙다며 일이 정리되면 밥이나 한끼 먹자고 얘기했다. 하지만 이 형도 나도, 나중에 웃으며 함께 밥먹을 날이 올 것 같진 않다.
더 단단해질 것이다. 무딘 나를 도와준 고마운 이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