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테드 창
2016년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가 인기를 끌면서 대만계 미국인 작가 테드 창은 세간에 널리 이름을 알려 ‘21세기 SF 소설계의 보물’이란 찬사를 얻게 된다. [컨택트]의 원작이 그의 단편소설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판타지적 요소를 제외하고 물리적,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한 정통 하드 SF 소설을 주로 발표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인기가 많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의 원작자인 필립 K.딕의 작품적 DNA를 함께 물려받았지만 판타지적 성향이 짙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대척점에 있는 작가라 해도 무방한 테드 창은 일반인에게 생소할 수도 있는 물리 법칙을 대거 나열함에도 독자들의 관심을 단번에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마 자유의지, 시간여행, 소통과 기억 등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들을 논리와 사실에 입각해 흥미진진한 서사로 그려내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선택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 또는 신의 장난 앞에서 어떠한 선택도 무의미해지게 될 때 그러한 무력감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작가 테드 창은 이 단편소설집을 통해 건조하면서도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에서는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관계를 굉장히 사실적으로 예측한다.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의 지능과 정신을 모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안다고 해서 프로그램화하여 뚝딱 인공지능을 감쪽같이 만들어낼 수 있을까? 테드 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경험 제원이다. 삶의 여러 상황들에 대한 행동반응이 누적되어 자아와 개성을 형성하고 인간의 특성이라는 데이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육아와 교육을 통해 ‘인간다움’은 더욱 공고화된다. 그 안에 잦은 마찰과 다툼이 있을지언정. 인간과 유사한 인공지능을 위해서는 이런 육아와 교육의 과정이 필요하고 소설에서는 디지언트라는 애기 인공지능들이 등장하여 인간들과 관계맺고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쭉 읽다보면 애기 인공지능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이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모습으로 확장되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디지언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하는 주인의 마음이다. 소설에서는 그러한 과보호도 디지언트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결국 주인은 무한한 자유와 불안의 세계로 디지언트를 보내며 씁쓸한 마음을 애써 삼켜낸다. 마치 자식을 사회로 내보내는 부모의 마음처럼.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진실은 선, 거짓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뿌리부터 뒤흔든다. 단편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진실이라고 다 같은 속성이 아니다. 누군가가 주장하는 진실이 사실 그 자체일 수 있는 반면 누군가의 진실은 개인과 개인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합의, 조작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그들)가 원하는 것이기에, 결국 진실인 것이다. 우리의 기억도 이 법칙에 구속된다. 망각이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망각은 종종 힘든 삶을 살아가기 위한 축복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 머릿속에 사실적 진실에 근거한 기억들밖에 없다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기억하기 싫은 것들도 경험한 그대로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망각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반면교사 삼을 생각의 공간을 얻을 수 있으며 아픈 과거를 미화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과거에는 입으로 역사가 전승되었다면 근대에는 글로 전승되어 사실의 정확도가 향상되었고 현재는 사진, 동영상, SNS를 통해 더욱 기억의 사실적 정확성이 올라가고 있다. 망각의 기회를 점점 잃게 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결국 정신적 고통의 증가와 함께한다. 하지만 작가 테드 창은 여기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를 알려준다. 우리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잘못을 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역시 단편소설집의 제목이었던 ‘숨’ 그리고 ‘옴팔로스’이다. 이렇게 따로 선별한 이유는 이 이야기들이 정말 작은 진리로 거대한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숨’이 그에 대한 미학적 묘사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탁월하다. 숨 쉬는 행동은 인간이 가장 흔하게 하는 행동이라 그 중요성이 경시되었지만 실은 인간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동인이다. 테드 창은 공기의 중요성에서 한 발 더 들어간다. 바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공기의 소중함 때문이 아니라 폐와 외부 공기가 호흡할 수 있는 원리가 되는 ‘기압 차’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불균형, 소중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게 해주는 우주 전반을 흐르는 엔트로피의 원리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는 역설한다. 우주는 필연적으로 무질서도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가 원자적 질서가 잡힌 영양분을 섭취하고 무질서적 에너지인 열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더러워지고 부패하는 것처럼 삶의 파도는 질서에서 혼돈으로 향한다. 우주는 계속 팽창한다. 빅뱅부터 시작하여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것의 간격은 결국 넓어질 것이고 중력의 힘은 약해질 것이다. 기압 차도 약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질 좋은 공기가 있다 한들 절대적인 평형 상태에서 우리는 호흡을 할 수 없다. 즉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정지한다. 시간마저도.
이 사실을 깨달았다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말기를. 당신이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잉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떤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숨’
‘옴팔로스’와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다룬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하지만 신이 태양을 만들지 않았어도 인간을 만들었다는 믿음은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고난 앞에서 지혜를 달라고 신께 기도한다. 하지만 신이 바라보고 있는 피조물의 존재는 따로 있고 인간은 그저 창조의 부산물, 작품을 만들기 위한 실습적 창조, 아님 실수에 불과하다면? 완벽의 신께 다가가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존재해봤자 뭐해, 자유의지가 있어봤자 뭐해, 성공해봤자 뭐해, 우리는 무기력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고 실존적으로 우뚝 서야 할까? 바로 과학의 기적에 감사하는 것이다. 우주 창조는 기적이다. 인과의 사슬로 고정되지 않은, 말 그대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다. 정녕 의지할 수 있는 신이 없더라도 진정한 선택 역시 물리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결과를 일으킨다. 자유의지로 인한 모든 행동은 우주창조와 비견되는 기적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선택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더라도 나 스스로는 선택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세상에 더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과학과 종교의 융합일 것이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왜’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 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해나가겠습니다. 이런 탐구야말로 제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옴팔로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삶의 이유를 찾아간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모두가 걱정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