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 인상적인 글을 하나 읽었다. 한 브런치 작가님이 자신이 글을 쓰는 세 가지 이유를 공유하셨다.
1) 마음의 치유.
2) 글 쓰는 인생이 그분에게 딱 맞는 인생이라서.
3) 그분의 인생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1984와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은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이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정치적 목적, 역사적 충동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글을 쓴다는 행위는 우리 내면에서 설정한 무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다. 난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단지 그 이유로 지금까지 글을 써 왔다. 하지만 이분의 글을 읽어보니 그것보다는 깊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치 ‘글 쓰는 이유 세 가지’ 챌린지 처럼, 나도 나만의 이유 세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어릴 때 동생과 역할극 놀이를 하곤 했다. 어릴 땐 공룡을 좋아했기 때문에 서로 각자 좋아하는 공룡이 되어 장난으로 싸우기도 하고 협력하여 사냥하기도 하고 토론(?)도 하고 그랬다. 항상 공룡의 그르릉 소리를 흉내내며 말했기 때문에 공룡 놀이를 마치고 나면 우리 둘의 목은 쉬어서 한동안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정겨운 추억이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 내가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공룡이 되기도 했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도 했으며 역사 속 위인이 되기도 했고 곤충이 되기도 했다. 다양한 자아를 경험해 스스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탐구해보고 싶다는 무의식적 열망이었을까.
질풍노도의 중학교 시절, ‘나’를 알아가기 위해 혼돈의 고통을 경험하던 시절 그 무의식적 열망은 기어코 직접 소설을 써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경험한 창작의 기쁨은, 그 설렘과 흥분은 워낙 강렬했기에 지금까지도 그 느낌이 생생히 기억난다. 비록 소설 자체는 지금 읽기엔 워낙 설정이 어리숙하고 문체가 오글거려서 없애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창작의 기쁨이라는 그 느낌의 소중함을 알기에, 언젠가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숭고한 사람이 되어 제대로 된 소설을 쓰고 싶기도 하기에 그 추억은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때의 설렘으로 지금까지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싶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그 감상을 브런치에 발행했던 글 ‘인간의 원죄’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어릴 적 경험이 하나 있다. 어릴 때 이집트 피라미드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한 편 본적이 있었다. 거대한 피라미드 속 갇혀있는 한 시체를 보고 나 또한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처음 실감했던 것 같다. 육체의 태엽이 전부 감겨 죽게 되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온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죽으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는 할까? 이 넓고 광활한 우주에 내 영혼 하나만을 위한 작은 공간조차 없는 것일까? 난 우주로부터 추방당하게 될 것인가? 그 아득한 쓸쓸함과 고독함을 느끼며 다큐멘터리를 본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잠을 설쳤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때로부터 며칠 뒤 엄마와 동생과 함께 국립어린이과학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관한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여러 물리 법칙들을 몸소 보여주는 기구들, 그의 생애를 정리한 사진과 기록, 동생과 엄마와 함께 재밌어하며 공유했던 아인슈타인의 모든 순간들은 그 당시 전시회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기록으로 남은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들이 그를 영원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도출해내진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영원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주로부터 추방당할까봐 두려웠던 나의 마음은 글과 이야기에 더 집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존경하는 교수 조던 B. 피터슨의 저서를 읽고 그 감상을 브런치에 발행했던 글 ‘중도의 가치’에 언급이 되었던 그의 인상깊은 한 마디가 있었다. “우리가 진정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특정 사안에 대해 자신만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한다. 인터넷 댓글에는 특정인에 대한 근거없는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고 언제부턴가 중도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게 된 뉴스기사의 편향된 보도를 보고 성급하게 사안을 결론내려 사회를 비판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언론의 이런 진영싸움에 휘둘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극적인 제목과 기사내용의 에너지에 휩쓸리다보면 어느샌가 특정인을 비판하게 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는 중요하다. 성급한 신념은 위험하다. 하지만 신념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하다 잘못된 생각에 매료되어 그릇된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이 양날의 검을 제대로 잘 갈아서 신념을 고정관념이 아닌 확신의 수단으로 쓰게 된다면 신념은 혼돈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최고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마치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으로부터 나온다는 운동에 대한 나의 신념처럼. 신념이라는 양날의 검을 더욱 날카롭게 가는 과정이 나에겐 글을 쓰는 과정과 동일하다. 글을 쓰며 몰랐던 나 스스로를 알아가고 최선의 결과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생각을 적어내리는 일련의 과정들은 나에게 꼭 맞는 신념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게 얻게 된 소중한 생각들은 온전히 내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꼭 세상에 남겼으면 좋겠다던 그 브런치 작가님의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 작가분의 소망처럼 여기 브런치에 다양하고 솔직한 경험들이 더욱 많이 공유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난 브런치를 그동안 기록 저장소로만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몇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글로 다듬어진 개개인의 경험들을 공유하는 것이 꽤나 즐겁고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웃기고 재밌는 일화를 적으신 작가님도 계시고 큰 용기를 주시는 작가님도 계신가 하면 철학적으로 큰 깨달음을 주시는 작가님도 계신다. 뭉클할 정도로 따뜻한 글로 위로를 주시는 작가님도 계신다. 이분들이 적은 모든 생생한 경험들이 타자를 치는 손가락을 통해 브런치라는 공간을 활보하는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 모두의 삶을 밝게 비춰줄 수 있는 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소한 생각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소중히 여겨 글로 인생의 자취를 남기고 계신 이 글을 읽는 모든 작가님들이 이를 통해 대화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오로지 글의 소통만으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보석같은 무언가를 발견하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