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가끔 얄궂은 데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미운 이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원수에게 자신의 반대쪽 뺨까지 내밀 수 있을까?
내가 담당하는 관측반 용사들 중에 엘리트가 한 명 있다. 관측장교인 나 못지않게 관측이론, 관측기재 사용법 등 주특기 능력이 출중하고 간부님들, 용사들이 가리지 않고 그 엘리트 친구가 관측반 용사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는, 그런 친구가 있다. 성격도 씩씩하고 붙임성 있어 나 역시 이 친구가 내 관측반에 분대장으로 있는 것이 든든하고 좋았다. 처음에는.
너무 칭찬만, 촉망만 받고 지내서 그런가? 일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이 엘리트 친구는 짜증을 내곤 했다. 다량의 유인물을 인쇄할 때 프린트 설정을 잘못해서 용지를 버리게 생겼을 때, 후임 용사들이 자기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할 때 이 친구는 어김없이 짜증을 내었다. 마치 지금 사태에 대해 자기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태도로. 여럿이서 같이 시간에 쫓기며 일하다 보면 소통을 하지 못하거나,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의도가 달라서 흔히 생길 수 있는 실수들인데 이 친구는 마치 그동안 쌓아놓은 엘리트 이미지를 지키려는 것처럼 이런저런 핑계만 늘어놓기 바빴다. 정리하자면 화내야 할 타이밍과 내지 말아야 할 타이밍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 넌 스스로를 직면해야 해. 시간 날 때 이 친구를 따로 불러 얘기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업무는 맞춰가면서 하는 거지 자기 생각대로만 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일대일로 따로 불러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후임 용사들이 보는 앞에서 그 엘리트 친구를 혼냈다. 그가 짜증을 내는 스스로의 태도에 당당한 모습이 견디기 힘들어서. 그 친구는 자신이 왜 혼나는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나는 그저 한숨만 쉰 채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그날 이후 그 친구와 거의 대화가 없다시피 지냈다. 그 친구가 관측반 분대장이었기 때문에 가장 많은 대화가 필요한 사이였는데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관측반 통솔 자체에도 애로사항이 생겼다. 난 그 친구가 남 탓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일부러 일을 별로 시키지 않았고 그 친구도 관측장교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관계에는 봉합되지 못할 금이 생겼고 둘 다 그걸 모른 척하며 지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주특기 평가를 보게 되었다. 관측반의 주특기 평가라 하면 관측 과목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시험을 보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휴가 일수가 차등 결정되는, 참가자 모두에게 중요한 시험이었다. 나는 용사들을 교육하기 위해 당연히 모든 내용을 숙지한 상태였고 시험 역시 당연히 1등할 자신이 있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잘해야 했기에. 누구나 관측장교는 1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관측 장비가 시험장에 두 대밖에 없어 시험은 두 명씩 진행되었고 순번에 따라 나는 그 엘리트 분대장과 함께 시험을 보게 되었다. 시험 전에 미리 장비 설정을 완료하고 정해진 매뉴얼대로만 평가를 보면 되는 상황이었다. 우리 앞 순번 용사 두 명이 평가를 끝냈고 우리 차례가 왔다. 우리는 앞 순번 용사들이 시험을 치르며 조작한 장비들을 시험 시작 전 최초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다시 조작해야 했다. 장비 조작이 끝났고 우리의 평가는 시작되었다.
연습한대로 수월하게 평가를 진행하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가 생기지 말아야 할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상하다, 시험을 치르기 위한 장비 설정은 이미 완료했는데 어떤게 문제가 되는 거지? 왜 거리측정이 안되는거지?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한 나는 당연히 장비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이의제기를 했다. 평가를 주관하던 정보과장님은 그 장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제한시간이 거의 끝나가니 빨리 평가를 마무리하라고 재촉했다. 초조했다. 원래 5분의 제한시간이 있으면 2분 안에 끝낼 수 있을 정도로 수없이 연습했는데, 도대체 거리측정이 왜 안되는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난 6분을 넘겨버렸고 관측반을 통틀어 가장 낮은 점수를 얻게 된 관측장교가 되었다.
평소 내 실력을 알고 계셨기에, 관측장교는 당연히 1등을 해야 했기에, 내 결과를 보고 당황했던 정보과장님은 옆에서 같이 장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인을 발견했다. 보안상 정확한 수치를 말하면 안되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망선 설정이 원래는 50m로 설정되어 있어야 했는데 내가 사용한 장비는 무슨 600m로 설정되어 있던 것이다. 말도 안돼. 분명 시험보기 전에 최초상태 50m로 장비 조작 완료하고 시작했을텐데.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시험보기 직전 장비를 최초상태로 조작할 때 서로가 상대방 장비를 조작했다는 것을. 즉 엘리트 분대장이 내가 평가 볼 장비의 망선 설정을 50m가 아닌 600m로 맞춰놓은 것이다.
아뿔싸, 안일했다. 당했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바로 한마디 하려다가 멈췄다.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이대로 화를 내버리면 남들이 보기에 자격지심만 내비치는 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작게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정보과장님은 내가 망선 확인을 안했다며 결과 그대로 반영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당연히 시험 전에 조작이 완료되어야 할 부분이 잘못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억울하긴 했지만, 나는 결과를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건너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었기 때문에.
한때 나와 사이가 꽤 좋았던 그 엘리트 분대장은 어느새 원수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난 그 친구를 쳐다볼 수 없었다. 인내심을 잃을 것 같아서. 난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관측반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 그저 꼭 필요한 일들을 제외하고는 그들과 교류하지 못했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안일했던 스스로가 한심해서. 무엇보다도 화가 났다. 성경에서 흔히 나오는 말처럼,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 친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뺨을 맞으면 반대 쪽 뺨도 내밀 수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라. 어릴 땐 이 말이 참 싫었다. 사람을 호구로 만드는 것 같아서. 이보다 멍청한 말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난 평가 이후 관측반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난 자존심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게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일까? 곰곰이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생각이 난 건 내 원수가 잘못한 것들이었다. 일을 할 때 책임을 지지 않고 후임 탓을 하고, 평가 때 내 망선 조절기를 최초상태로 고정해두지 않고. 그럼 그렇지, 그 친구가 잘못을 했지.
잠깐, 그럼 나는 무슨 잘못을 했지?
원래 사람은 스스로에게 관대하다고 하지 않는가. 최선의 상황을 위해서 나는 스스로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해야 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 나는 우선 후임들이 보는 앞에서 분대장을 혼냈다. 따로 단둘이 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그 친구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그게 내 첫 번째 잘못이었다. 나 역시 그 친구처럼 화 내야 할 타이밍과 내지 말아야 할 타이밍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잘못, 꼼꼼하게 평가보지 못했다. 아무리 시험 전에 마무리되어야 했을 요소였다 한들 시험 중에 내가 당황해서 모든 변수를 생각해보지 못한 건 사실이다. 아무리 누가 어떤 트릭을 썼다 해도 나보다 더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시험 중에 망선 재설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내 능력 부족도 한몫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일까?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관측반이 다시 굴러가기 위해서. 봉합되지 못하고 커져만 가는 관계의 금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라, 내가 뺨을 두 번 맞았네. 그때 깨달았다. 원수에게 뺨을 맞고 나서 반대쪽 뺨도 내밀라는 말은 결국 상대방의 잘못만 생각하는게 아니라 스스로의 잘못도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을 외면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의미였다. 뺨 맞은 것처럼 아플지언정.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 엘리트 분대장은 나에게 원수가 아닌 스승이 되었다. 화낼 때와 내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고, 좀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스승. 그렇게 나는 원수를 사랑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봉합되지 못한 관계의 금을 다시 이어 붙일 첫 단추를 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