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시대마다 각기 고유한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독특한 책은 과거와 구분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책에 따르면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파생되는 부작용도 발전해왔다. 교통, 과학, 무역의 발달로 모두가 연결되기 시작한 근대에는 전염병이 유행했다. 이후 연결이 지속되고 경계가 무너지면서 인터넷과 통신망의 발달로 세계는 점점 지구화되고 통합되었다. 다양성을 포용하게 되면서 과잉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게 현대에는 우울증, 소진 증후군 등 신경증이 유행하게 되었다. 사회적 부작용은 전염병에서 신경증으로 진화했다.
세계가 통합되며 경계는 허물어졌고 다양한 관점의 발달로 절대성이 흐려졌다. 그렇게 기존의 전통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의 무한한 가능성은 곧 무한한 공허를 낳게 되었다.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길을 헤매며 자유의 무게를 실감하게 되었다. 길을 안내해줄 가치관이라는 표지판 하나 없는 미로 속에서 우리는 금방 지치고 소진되었고 일상적이고 깊은 피로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었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만이 아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현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우리를 만성적으로 피로하게 만드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광고를 생각해보면 쉬울 것 같다. 유튜브나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 우리는 불쑥 예상치 못하게 광고를 접하게 된다. 15초라는 부담없는 시간동안 광고는 선별될 여지를 주지 않고 우리의 인식 속으로 침입한다.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광고를 거절하기 힘들다. 즉 인식의 경계선은 허물어지고 우리는 점점 거부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를 만성적으로 피로하게 만드는 것의 정체는 ‘수용’이다. 전염병이 도래했던 시기와는 다르게 우리는 많은 것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우리의 인식 상태도 과잉 상태, 포화상태가 되어 결국 일상 속에서 잦고 만성적인 피로감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현대사회는 ‘No’ 보다 ‘Yes’가 더 각광받는 시대이다. ‘난 못해’가 아닌 ‘할 수 있어’가 더욱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시대이다. 우리는 무엇을 거절하는 법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고민보다 Go’ 처럼 거절보다는 수용을 지지하는 많은 문구들이 습관처럼, 진리처럼 우리의 뇌리에 자리하고 있다.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는 ‘태도’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부정하는지보다 더욱. 이러한 무조건적인 긍정은 경쟁 상대를 타인이 아닌 자신으로 정의내려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긍정’이라는 밝은 이미지는 스스로에게 가하는 착취에 ‘자유’라는 환상을 입혀 더욱 현대 사회에 걸맞는 안성맞춤형 질병으로 거듭난다.
근대의 활발한 교류의 시대, 전염병 시대에서는 위험한 타인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중세, 근대에 치른 수많은 전쟁들로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민족성을 확실하게 정의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는 ‘초국가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기존에 정답으로 여겨졌던 정체성, 민족 서사, 신화는 사라졌다. 개개인의 정체성을 고결하게 만들던 서사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로지 열심히 일할 손만 남은 초라한 현대인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사와 낭만이 사라진 발가벗겨진 자아는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더욱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민족적 후광이 없는 한 나는 항상 더 발전하고 성장해야 해. 이러한 기대치와 채찍질이 우리를 항상 피곤하게 만들고 만성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원인인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를 착취하며 발전해나가는 것처럼 세계도 끝없이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만성적인 피로감을 줄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우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끝없는 기대와 성장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유일하고 특별한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며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 내린 결론은, 바로 가만히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며 조급해하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빨리 가는 것은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깊은 심심함 속에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요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바쁠 때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심할 때 비로소 깊은 사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사유가 없는 삶은 목적과 낭만이 없는 삶이며 이유를 상실한 삶이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비록 세계의 미래가 사유보다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에 좌우될 터이지만 사유도 우리의 미래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활동적 삶의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활동적인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사유와 관련하여, 종종 우리는 멀티태스킹이 안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있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한명인데 난 누군가와 카톡을 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 그래서 종종 꾸중을 듣곤 했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멀티태스킹은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퇴화다. 멀티태스킹은 오히려 야생동물들에게서 주로 발견된다. 먹이를 먹는 동물은 동시에 다른 동물들이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신경써야 하며 짝짓기 상대와 새끼들을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깊이있게 사색적으로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멀티태스킹에 능한 사람들은 분명 심도있게 생각하며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익숙해져 기계적으로 적절한 답변만 제시하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너무도 다른 개개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일말의 고민도 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멈춰 고민할 수 있는 정성이 필요하다. 멈춰있는 사람들은 결코 도태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더욱 발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한 기계적인 노동에 함몰되지 않고, 그 누구도 함부로 상상할 수 없는 찬란한 생각들을 내뿜기 위해 기꺼이 머뭇거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성장이라는 덫에 빠져 파멸로 치닫는 인류를 진정으로 구원할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