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아름다운, 소멸의 세상

하지만 행복은 바로 그곳에

by 이브와 아담

한계, 소진과 같은 종류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을 것 같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당장 벗어나는 것이다. 마치 폭탄을 발견한 것처럼 멀리 도망가는 것이다. 숨통을 옥죄어오는 고통을 무시하는 순간 우리의 생존 본능은 사라진다. 고통이라는 에어백 없이 위협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면 우리의 정신은 너무도 쉽게 붕괴된다.


사실 소진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바쁜 업무에 슬슬 적응한 단계였지만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신음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달려왔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고통을 무시한 내 이성을 혼쭐 내려는 듯 어느새 입술도 부르터 있었다. 하지만 사수가 파견을 나가 다량의 업무 공백을 메꿔야 했던 상황에서 쉬고 싶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꽤나 부담되는 일이었고, 난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일들을 묵묵히 해치워나가고 있었다. 나에게로 다가오는 한 줄기 빛도 보지 못한 채. 내가 발견하지 못하자 그 빛은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한 일주일 동안 휴가라도 다녀오렴.

워낙 오랫동안 집에 가지 못했던 터라 이 말을 듣고도 딱히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현실성 없게 느껴졌기 때문에. 원래 일주일 전에 나갈 예정이었던 휴가가 취소되는 바람에 크게 기대를 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뭐지, 이번에는 포대장님이 정말 보내줄 기세였다. 주말에 짐을 싸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유의 감정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록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찰나의 아름다운, 소멸의 세상이었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부대에서 일찍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거리가 거리인지라 집에 도착해보니 벌써 저녁시간. 족발이 먹고싶다는 누나의 명령을 따라 봉지를 들고 집 앞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그동안 적잖이 그리워했던 아빠를 만났다. 사실 오랫동안 가족들을 보지 못하면서 나 모르게 다들 많이 변해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아빠는 여전히 우직한 걸음걸이와 정장에 어울리지 않는 배낭으로, 여전히 난 너가 알고 있는 그 아빠 맞다고 반기고 있었다. 우리 가족을 위해 별을 따다 준 고마운 아빠. 오늘도 어김없이 열심히 살아준 아빠. 가뜩이나 말을 많이 해야하는 사람이 인후염에 걸려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오랜만에 얼굴 보자마자 걱정하기보단 미소짓기를 선택하며 아빠 어깨를 마사지해준다.


집에 도착해보니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기운과 어둠, 정적만이 집안을 감돌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럴 때 실망하면 안되는데. 내 머릿속 주인공은 기어코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았다. 조용히 있어. 어둠은 내가 밝히면 되는거야. 거실 불을 켜고 방에다 짐을 둔 다음 서늘한 정적을 없애기 위해 아빠한테 가족들의 근황을 묻는다. 아빠가 최근에 꿨던 악몽, 100일이 갓 지난 동생의 청춘사업, 유튜브로 요리를 공부하기 시작한 엄마 등 재밌는 일화들을 듣고 한바탕 소리내어 웃고 나니 어느새 어둠과 정적은 걷히고 집 안에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누나와 매형과 공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고 동생은 여자친구와 데이트하기 바빠 저녁을 함께하지 못할 예정이었다. 아빠는 동생이 괘씸했나본지 바로 전화해서 형이 오랜만에 집왔는데 냉큼 들어오지 못하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에이, 분명 데이트가 선약이었을텐데 괜찮다고 말하지만 아빠는 그래도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지 못해 섭섭하셨나본지 어차피 헤어질거 저렇게 꽁냥대는거 보면 우스워 죽겠다고 낄낄거리셨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마냥 같이 웃었지만 아빠는 ‘너 봐라, 다 부질없잖냐’, 내 가슴에 대못을 시원하게 박아버리셨다.


엄마와 누나, 매형이 집에 도착하고 어느새 집은 따뜻해져 있었다. 족발 봉지들을 보더니 누나는 소리를 지르며 쨔식, 돈 좀 벌더니 씀씀이가 멋있어졌다고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엄마는 오랜만에 본 아들이 머쓱했나본지 인사도 없이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여전히 소녀 소녀한 감성으로 상의와 하의, 심지어 양말까지 진분홍색으로 맞춰 입은 엄마의 모습도 여전히 난 너가 알고 있는 그 엄마가 맞다며 반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웃겨 안방으로 따라들어가 엄마 등을 손가락로 툭툭 쳐 인사를 건넨다. 엄마는 그제서야 마치 처음 봤다는 것처럼 환한 얼굴로 날 반겼다.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엄마, 안 아플 만큼만 세게 끌어안으며 인연의 축복을 만끽했다.


변화가 없어 반가운 부분이 있는 만큼 변화가 있어 어색한 부분도 있었다. 바로 매형의 존재. 작년 말 누나 결혼식을 마쳤을 때만 해도 우리 가족들은 매형과 어색한 사이였는데 어느새 매형은 모두와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어 집 안을 온기로 채우는데 일조하고 계셨다. 하긴,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어떻게 변화가 없을 수 있겠어. 변화가 없길 바라는 내 마음은 어쩌면 우리 가족들의 모든 모습들을 놓치기 싫은 마음이었고, 여전히 가족이라는 공간에 내 자리가 남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난 시계를 멈추게 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니 받아들일 수밖에. 나 모르게 앞서간 추억의 시간들을 쫒아가기 위해 달려야겠다고 결심한다.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부족한 부분도 있는 우리 가족들과 이렇게 잘 융화하여 집안을 웃음꽃 피게 만들어주시는 매형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결혼식 때 낭독하셨던 것처럼,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와 사랑으로 고난을 헤쳐나가겠다는 다짐을 지키고 계신 것 같아 감사하다는 마음을 언젠가는 꼭, 전해야겠다고 결심한다.


함께 근황을 얘기하며 족발을 먹으면서도 아빠는 괘씸하지만 자리에 없는 동생이 눈에 밟혔는지 빈 그릇에다 족발이라는 사랑을 한가득 담아 놓으신다. 누나와 나는 아빠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 눈을 마주치며 웃는다.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언제쯤 적응할 수 있을까, 집으로 가려고 아직은 낯선 남자와 함께 문 밖을 나서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딸은 시집가면 출가외인이 된다고 어르신들이 흔히 말씀하시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언제나 이 집에는 누나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과 공간이 남아있다. 우리 가족들의 기억 속에도 누나는 언제나 남아있다. 누나에게서 뿜어져 나온 향기가 집안을 감싸고 있는 한, 누나는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누나가 없어도 우리들은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하면서, 잠들기 전에도 누나의 향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되새기고 추억하고 있으니 갈 곳이 없을 땐 언제든 집으로 오라고, 와서 오늘 내가 느꼈던 ‘가족’이라는 행복을 경험해보라고, 떠나가는 누나에게 그저 잘 가라는 짧은 한마디와 미소 속에 담아 전해본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행복도 일주일 뒤면 사라질테지만, 그동안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겪을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상에서 얻은 여유와 행복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견딜 수 있을테니. 집안을 더욱 밝게 만들어놓고 떠나겠다고 다짐한다. 가족들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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