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살으리랏다

by 기록하는아빠

고등학교 국어 시간, 청산별곡을 배웠다.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속세를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꿈꿨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청산에서 살고 싶었다.




지방을 사랑했던 시절

중학교 때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 넓은 집, 여유로운 거리, 깨끗한 공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내가 지방에서 살 것이라 확신을 했고, 서울 상경을 꿈꾸는 친구들을 타박하기도 했다. 대학은 부모님 곁을 떠나 독립하여 10년간 살았다. 10년간 월세를 썼지만 여전히 서울보단 나았다. “굳이 서울로 올라갈 필요는 없어.”




그런데 서울로

대학원을 졸업하니 현실을 마주했다. 내 전공 관련 일자리는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른 직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민 끝에 서울에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 “몇 년 경력만 쌓고 내려갈 거야.” 사회초년생으로 서울에서 보낸 시간. 월세를 아끼기 위해 회사 기숙사로, 정부지원 원룸에 살았고, 매일 구겨져 출퇴근을 하며 청산별곡의 그 구절을 자꾸 떠올렸다.




선택의 기로

사회생활을 한 지 몇 년 차. 이제 제법 통장에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고민의 시작. “이 돈으로 어디에 살 것인가?” 지방에 살게 되면 훨씬 넓고 좋은 집에 살 수 있었다. 당연히 지방이 끌렸다. 거의 결정을 앞두고,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나중에 내 아이는 어디에 살게 될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학업을 위해 자취를 한 8년, 그리고 서울에서 산 몇 년까지. 한 달 생활비 100만 원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억 단위를 소비한 셈이다. 만약 내가 지방에서 산다면? 내 아이도 대학은 서울로, 취업도 서울로 갈 확률이 높다. 결국 내 아이도 최소 10년간 월세를 쓰게 된다.




청산별곡을 거꾸로 읽다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청산의 여유는 아름답지만, 그건 나 한 세대만의 여유였다. 만약 내가 지방에서 생활한다면, 조금 더 여유롭게 살 수 있겠지만, 아이는 서울에서 월세를 쓰며 고생한다. 그건 내 여유를 위해 아이의 출발선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속세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청산에서의 삶도 여유가 있어야 선택할 수 있는 법이다.

지방의 여유를 사랑했던 내가 서울을 선택했다.


비싸고, 좁고, 대출에 쪼들리며 삶이 윤택하지 못하더라도 내 아이에게 서울을 물려주고 싶었다. 서울이 무조건 답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일자리와 교육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서울에서의 삶은 내 아이에게 많은 것을 물려줄 수 있는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청산별곡을 거꾸로 썼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서울에 살어리랏다.”


이건 내 여유가 아닌, 내 아이의 출발선을 위한 선택이다. 지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 글이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P.S. 은퇴를 하면 청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내에게 허락을 받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