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알고 있어야 할 대처법
영국은 다른 유럽권에 비해 제법 안전한 나라다.
치안이 아주 좋다곤 볼 수 없지만, 미국처럼 누구나 총을 소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길거리를 다니면서 매순간 소매치기를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는 된다.
하지만 영국은 테러로부터 안전한 나라는 결코 아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런던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일어난 테러만 5건에 달한다. 런던 관광객들이 꼭 한번은 들르는 웨스트민스터와 빅벤 근처 다리에서 총격 테러가 발생해 한국인이 중상을 입은 적도 있다. 5달이나 영국에서 치료를 받고 겨우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영국에 사는 소수 인종이 또 하나 신경써야 할 문제는 인종차별이다.
단순히 눈빛이나 말, 사소한 행동으로 느낄 수 있는 인종차별은 사실 어느 나라에나 있다. 특히 영국처럼 다양한 인종이 이민자로 들어와 살고 있는 나라에선 더 그렇다.
런던은 전체의 20% 가량이 이민자로 구성돼 있고 그보다 규모가 작은 도시들은 이민자의 비중이 30~40%에 가까운 곳들도 적잖다. 이민자들이 영국의 좋은 대학에 진학해 양질의 일자리를 차지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해 기존 영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이유로 이민자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많다.
사실 한국인들끼리만 모여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에서 온 내가 인종차별의 잘잘못을 논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언어와 문화, 식습관, 종교 같은 삶의 아주 기본적인 부분이 다른 인종들이 모여서 화목하게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긴 하다.
영국인이 역으로 느끼는 박탈감으로 인한 인종차별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지만, 심각한 건 그 인종차별이 물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질 때다. 영국에선 잊을만하면 한국인 유학생이 벌건 대낮에 번화한 거리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아주 자주는 아니지만, 계절마다 한 두번은 듣는 것 같다. 정말 마음 아프고 화가 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인종차별은 제대로 교육받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지 않는다. 마음 속으로는 특정 인종을 무시하고 경멸할지라도 겉으로 표현하는 걸 옳은 행동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국에서도 그게 상식이다. 하지만 극우적인 성향을 가진 성인이나 나이 어리고 철없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소수 인종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놀이'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 같다.
10년전 학부생으로 유학할 당시에도 늦은 시간 도로변에 동양인이 혼자 걷고 있으면 차를 타고 지나가다 창문을 내리고 계란을 던지는 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났었다. 한 번 당하면 이 나라가 싫어질 정도로 상처받고, 내가 왜 여기와서 소수 인종이라고 차별 받으며 공부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거다.
테러와 마찬가지로 이런 폭력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최근 영국 분위기가 브렉시트 전후 점점 더 보수화돼 가고 있는 상황에선 인종차별로 인한 폭력에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길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시비를 걸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하는 경우에는 대응하지 않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최선이다. 상대해주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따라올 기세라면 눈에 보이는 가깝고 사람 많은 상점에라도 들어가 도움을 청하는 게 좋다.
영어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런 식의 질 나쁜 행동을 하는 상대방과 대화를 시도하거나 따지려고 하면 더 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거다.
피하지 못하고 폭력을 당하기 시작했다면 불특정 다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말고 가까이 있는 누군가를 지목해서 도와달라고 해야 한다. 개념없는 10대 청소년들은 현지 성인들에게도 무서운 존재다. 군중의 입장에서 누군가 도와달라고 했을 때 무서워서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나를 직접적으로 지목해 도움을 요청하면 가만히 있으면 외면하는 게 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슬프게도 영국 경찰은 한국 경찰들과는 좀 다르다. 대대적인 테러가 발생하거나 살인사건이 나면 현장에 즉각 출동하지만, 귀중품을 빼앗겼거나 단순폭행을 당했거나 반사회적 행동을 보이는 누군가로부터 불쾌한 경험을 당했다고 신고해도 즉각 대처해주지 않는다.
사건사고도 우선순위를 따져 대처하고, CCTV 만으로는 인물을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엔 사건을 간단히 종결하기도 한다고 한다. 영국에서 자전거나 노트북 같은 귀중품을 잃어버렸을 때 경찰에 신고해봐야 범인을 잡거나 되돌려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예산 삭감과 인력 부족도 영향을 미쳤을거다.
주영 한국대사관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영국 경찰은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어떤 문제를 일으켜 체포할 경우 그게 아무리 가벼운 일이라도 영장 없이 36시간 동안 구금하고 풀어주지 않을 수 있다. 대사관에서 나서서 풀어달라고 해도 이건 영국 경찰의 권한일 뿐이다. 대사관이 할 수 있는 건 협조를 요청하는 정도일거다.
물론 학교에서 교수로부터 명백한 차별을 당했다면 그냥 자리를 피하지 말고 학교에 정당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사과를 받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일을 당한다면, 나의 신변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마이너리티로 다른 나와에 와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옳지 않은 행동이라고 여기고, 같이 안타까워하고 걱정해준다. 영국에서 불쾌한 경험을 한 분들이 너무 큰 상처를 받지 않고, 잘 극복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나도, 내 가족도, 낯선 나라에서 당하지 말아야 할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게 되기를(ㅠㅠ) 간절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