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t and Found

인생은 아이러니

by 니은
@HEEEUN, Cardiff Bay


인생은 아이러니다.

나는 느리고 오래되고 조용하고 아늑한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매일같이 바람 잘날 없고 마감에 쫓기는 기자로 10년 가까이 일했다.

일인분의 몫을 제대로 해내고, 사회에 폐 끼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나는 내 원래 색깔을 많이 잃어버렸다.

좋은 기자가 되는 것과, 내 색깔을 지키는 건

어쩌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서로 다른 가치처럼 느껴졌다.

'기레기' 소리도 듣기 싫었지만, '기자같다'는 말도 반갑지 않았다.


인생은 나와 진정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가는 긴 여정같다.

그 여정에서 내가 직접 느끼고 깨달은 것만이 내가 진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진정 배우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정말 알 수 없다.

올해초까지만 해도 내가 카디프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 불평만 하다가 어느 순간, 이것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뭔가 아주 큰 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다는 판단이 섰다.

신기하게도 그전까진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유학은 나와는 거리가 먼 꿈같은 것이었는데

모든 게 희미한 채로 시작했지만, 이렇게 나는 여기 와있다.


@HEEEUN, Cardiff Bay



공부할 곳을 영국으로 택한 건 순전히 내 취향이다. 느리고 오래되고 비가 많이오고 유럽으로 여행하기 좋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영국에 있는 네 군데 학교에 지원했고 런던의 Goldsmith, University of London과 카디프의 Cardiff University에 합격했다. 최종적으로 택한 건 카디프대. 전공은 내가 하던 일의 연장선상에서 고른 'Computational and Data Journalism'이다. Computer science와 Journalism을 접목한 과정이다.




준비가 쉽진 않았다. GRE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하면서 최저 요구점수인 IELTS 7.0을 넘긴다는 게 보통일은 아니다. 나는 짧고 굵게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성적이 나오는 편이다. 장기간 끈기 있게 공부하는 능력이 없다. 한달쯤 새벽 6시에 일어나 출근준비하기 직전까지 기출문제를 풀며 혼자 공부했다. 아무도 문자나 전화로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시간에 공부하면 능률이 두배로 오른다. IELTS 공부 비법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간대에 혼자 공부하면 원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CV, Personal Statement, Letter of Recommendation 등 유학 한번 가려면 준비할 것들이 정말 많다. 목적이 뚜렷하면 서류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은 시간이 다소 소요될 뿐 어려운 일은 아니다.


@HEEEUN, Cardiff University School of Journalism, Media and Culture.

반년쯤 준비해서 9월3일에 도착한 카디프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웨일즈의 수도라 인구는 30만명 조금 넘지만 시내는 꽤 크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고, 큰 공원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걷기에도 좋다. 카디프대 말고도 대학들이 몇 더 있어 비교적 젊은 도시다. 잉글랜드 브리스톨까지 기차로 한 시간, 런던까지는 두 시간쯤 걸린다.


전공엔 단 9명의 학생이 있다. 다른 미디어, 저널리즘 전공은 학생이 적어도 50-60명 되지만, 내가 택한 전공은 저널리즘 중에서도 탐사보도나 데이터 분석을 활용한 보도를 다루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대부분 언론 분야에 관심있는 학생들이 선택하는 다른 전공과 달리 우리 수업에는 필드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 꽤 있다. 국적은 영국인2, 미국인2, 이탈리아1, 브라질1, 칠레1, 리투아니아1, 한국1 이렇게 구성돼 있는데 절반이 기자 출신이다. 따로 친구를 만들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친구가 된다.


@HEEEUN laboratory


수업은 절반은 강의, 절반은 랩 형태로 이뤄진다. 데이터분석을 배우는 수업은 Computer Science 전공 학생들과 함께 듣는다.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영국 교육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배운 걸 실습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점이 좋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반대로 하고 싶은 일은 얼마든지 해도 된다. 어쩌면 가장 단순하지만, 이걸 위해 막대한 기회비용을 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똑같은 시간인데,

한국에선 허투루 흘려보냈던 하루하루가

여기에선 그냥 보내기 아까운 하루로 바뀌었다.

여기 와 있는 동안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또 다른 무언가를 얻게 되겠지...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다면

더 가치있는 걸 가지기 위해 포기할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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