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전공이 되면
취미가 전공이 되면 과연 즐거울까, 아니면 괴로울까.
나 같은 경우엔 선 즐거움, 후 괴로움에 해당된다.
취미였을 땐 굳이 잘해야겠다는 생각,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크게 들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의 경우엔. 취미생활을 할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는 요즘엔 그냥 짧고 굵게 즐기는 게 남는 거다 싶다.
전공은 늘 누군가의 평가를 받게 된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심사위원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관객들의 취향에 따라 내 작품은 좋고 나쁘고의 질을 평가받게 된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 할지라도 관객들과의 소통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전에 대상(관객)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라는 좀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그것뿐이랴. 내 작품이 누구에 의해 연주되는가도 중요하다. 연주실력을 떠나서 작품장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면 반드시 연습과정에서부터 삐그덕 거릴 거다. 이럴 경우 어떻게든 무대에 올린다 하면, 만족스러운 표현의 결과가 나올 거라는 기대는 미리 져버려야 한다. 연주가 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관객도, 연주자도 탓할 수는 없다. 그전에 먼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내가 대상을 생각하고 썼는지, 악기의 특성은 제대로 알고 썼는가 다. 작곡가들이 흔하게 하는 실수가 연주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자에게 요구할 때이다. 물론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해낼 수는 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일신홀: 개인 작품 연주회가 있던 날 최종 리허설이 끝나고. 첫 개인 발표회라서 그런지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했어야 했다]
리허설이 필요한 이유는, 특히 내 작품이 초연일 경우, 작곡가와 연주자 간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이미 작품에 끝세로줄을 그어놨고, 작품이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수정 따위는 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내 머릿속의 음악이 연주자의 입이나 손끝에서 현실화될 때엔 반드시 약간의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 차이의 오차를 줄이는 일이 리허설이다. 무작정 악보대로만 해달라고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신경 쓸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곡가와 연주자의 합이 어느 정도 맞았을 땐 무대 위에서도 굉장한 효과가 일어나게 된다. 아무리 익숙하지 않은 소리라 할지라도, 아무리 조금 부족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관객들의 반응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관객들과의 소통을 기대하고 있다면, 연주자들이 내 작품을 실수 없이 잘해주겠지가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악보와는 다른 틀린 음이 연주되었을 때 인상을 찌푸리면서 연주 후에 차마 연주자에게 말은 못 하고 맘에 담아두는 것보다는 이것 또한 음악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음악을, 적어도 작곡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Beat Furrer 작곡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번은 작곡가의 작품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조용한 음악이라 숨을 최대한 죽이며 음악을 이해하려고 했다. 몇 마디 지났을까, 내가 앉은자리의 반대편 끝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다행히도 바로 껐다. 음악의 중반부를 지나서였을까, 같은 사람의 핸드폰에서 또다시 울리던 벨소리.
지휘자는 음악을 바로 멈춤과 동시에 뒤를 돌아보면서,
두 번은 있을 수가 없어요!!! 젠장!!! (Zweimal geht nicht!!! Verdammt!!!)
현대음악은 워낙에 음악적 표현의 접근이 클래식과 다르기 때문에 연주자나 지휘자나 할 거 없이 굉장히 예민한 상태에서 연주에 임하게 된다. 심지어 현존하는 대작곡가가 관객석에 있을 땐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주변의 대부분의 관객과 연주자들은 문제의 벨소리 범인을 노려봤고, 지휘자는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작곡가의 작품은 처음부터 다시 연주가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벨소리 주인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Beat Furrer 작곡가. 모두가 예민하고 음악이 끊겼다는 상황에 실망하고 있던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어깨를 들썩거리며 동시에 가장 환하게 키득거리면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작품이 끝나고 콘서트가 끝난 후에도 자신의 음악이 방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단 한마디의 불만도 표현하지 않았다. 다만, 좋은 연주를 해줘서 고맙다는 말만 한채 사라졌다. 대가의 여유란 게 이런 거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취미이자 전공을 넘어선 어느 미지의 영역에 다다랐기 때문이었을까.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을 했기에 다른 방해요소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나도 이러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지만, 점잖게 반응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2017년에 여름에 완성한 첼로 솔로를 위한 가락 | Garak für Violoncello Solo가 연주홀에서 막 연주되기 시작할 때였다. 공연장 문은 오래되었는지 삐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문을 닫는 걸 까먹었는지 복도의 소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빨리 문을 닫으라고 했고, 문을 쾅 닫더니 자기는 어디에 앉아야 하냐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내 바로 앞에서 서성이던 그 사람을 한참 동안 쳐다봤지만 이미 내 음악에 대한 집중도는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첼로 연주자도 알 수 없는 소음에 집중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작품이 시작된 지 불과 1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일어난 상황이었다. 연주를 멈추고 다시 시작할까 고민도 했었다. 다행히 연주는 중단되지 않았고 작품은 무사히 잘 초연되었다. 아쉬운 건 녹음본과 녹화본에 내가 걱정했던 소음과 연주자의 당황해하는 표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라이브 음악의 매력이기도 하겠지만 초연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연주가 무사히 끝나고 문대인사를 하고 나니 불쾌했던 감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순간 기분이 그랬다는 거지 결국엔 감정적으로 크게 건드리진 않았다고 생각이 든다.
전공을 했다는 건 한 가지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취미생활은 방해를 받아도 언제든 또 내가 원할 때 언제 어디서든 즐기면 되지만, 전공이 되어버리는 순간부터 상황은 180도 달라지게 된다. 작은 거 하나에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00%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 오리란 쉽지 않겠지만 (바래서도 안 되겠고) 아직도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도 힘들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