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음악제(Pan Music Festival)가 한창이었다. 1969년부터 시작된 현대음악제로, 올해로 벌써 50회째 맞이했다. 따지고 보면 1969년부터라고 하면 50회가 아닐 텐데, 사실 정확한 역사를 날아보진 못했고 그냥 그러려니 한다. 음악제의 마지막날 역대 회장님들의 무대 위 모습은 마치 한국 음악의 역사를 한 번에 보는 듯했고, 이제는 고인이 되셨거나 원로작곡가로서 활동하시는 작곡가 선생님들을 한자리에서 뵙자니 한국판 어벤저스가 따로 없었다. 이분들이 젊었을 적의 음악세계와 지금을 비교하면 나는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궁금했었다.
당시에는 리허설 진행 보조를 하루 맡게 되었고, 하루는 서울의 어느 대학교에서 진행되었던 리허설 일정을 돕게 되었다. 대만에서 온 앙상블의 연습이 시작되었고 나와 함께 그날 일정을 총괄하던 선생님과 잠시 휴식을 취하러 건물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추워지는 날씨와 상관없이 한 손에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서로의 대화를 시작했다.
[2022년 제50회를 맞이한 범음악제 포스터]
강사직을 한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강사선생님들끼리 만나면 가장 먼저, 혹은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이야깃거리는 당연 어디 출강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어느 대학교는 몇 년째 출강하는지, 무슨 과목을 담당하는지부터 연주회에 많이 참석해야 얼굴이 알려지고 강사기회가 많아질 거라는 둥. 별 얘기를 다 했다.
나보다 한참 전에 공부를 마친 선생님들 중에서는 아직도 강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와 비슷하게 유학을 나갔다가 공부를 마치고서 바로 교수가 된 사람도 있다. 심지어 언제까지 강사로 불안하게 먹고살 수는 없다는 걸 일찌감치 받아들인 사람은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사업을 시작해서 산다고 한다.
돈이 안되니깐, 돈을 못 버니깐 순수 예술을 그만둬야 한다는 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며 본인이 처한 현실에 대해 한탄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은 좋은 대학 나오고 유학 잘 마치고 들어오면 뭐든 될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르는 강사의 삶이고, 자기가 가르치던 제자는 어느 대학의 정교수가 되어있었다고 하더라.
서울에서 지방을 매주 왔다 갔다 하는 건 여간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도 새벽 첫차를 타고 말이다. 기차로 짧게는 2시간, 길게는 4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필요할 땐 하루를 묵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으니 그냥 편의점의 라면이나 삼각김밥으로 때우며 배만 대충 채우면 그만이다. 수업준비가 많은 날에는 수업 전날 밤을 새우고 한두 시간 소파에서 잠깐 눈만 붙였다가 첫차를 타러 나가기도 한다. 어쩌다 한 번이면 차를 몰고갈 생각도 했겠지만 한번 해보니 두 번 다시 절대로 시도하고 싶지는 않은 거리다.
둘이서 하는 얘기라 말도 편하게 나왔다. 서울에 위치한 대학교에 계속 지원을 해서라도 지방에 가는 횟수를 줄일 수 있다고. 강사 월급을 생각하면 교통비와 숙소 지출은 출혈이 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아끼고 아낀다 하더라도 출강하는 어느 대학교는 월급의 거의 절반이 교통비와 숙박비로 나가게 되다 보니 육체적인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는 건가 싶다.
강사 자리도 현저하게 줄었다. 순수작곡을 하려고 하는 학생은 더 줄었다. 전체적으로 학생이 줄었는데 대학교에서 새로운 강사를 뽑을 이유가 없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둘 다 40이 넘은 지금,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닌 측에 속하기 시작했다고. 40 중반을 찍으면 체력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순간이 올 거라고 했다.
이전에는 작품 발표가 반드시 필요하고 음악회에 얼굴도장 찍으며 나 활동하고 있어요 가 중요하다고 들어왔지만 지금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라는 생각이 더 크다. 강사 경력 쌓아서 겸임도 하고 교수 지원도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주변에서 간혹 얘기하지만, 강사는 열심히만 하면 3년은 보장되지만, 겸임은 1년 계약에 더 불안한 위치라고 생각된다.
스펙만 쌓으면 누구나 쉽게 강단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학생수가 줄면서 자연스럽게 강단에 설자리는 줄어들고, 학교는 자연스럽게 지원자에게서 더 많은, 더 다양한 스펙을 요구하게 된다. 학위가 높던지. 경력이 길고 다양하던지. 예전에 한번 어느 대학교 강사임용에서 표시된 필수사항에 본인의 학위가 학사졸업이면 10년 이상의 강사경력을, 석사면 5년, 박사면 졸업 후 3년이라고 되어 있었다. 지원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싶었다. 당연 눈치를 챈 사람은 지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사를 졸업하고서나, 석사를 졸업하고서나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강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모든 공부를 마치고 처음으로 지원했던 어느 대학교의 면접에서 나에게 던져진 질문 하나.
"강사 경력이 없네요?"
차라리 서류에서 떨어뜨리지... 새벽부터 몇 시간 동안 열차를 타고 맞이한 면접장에서 맞이한 첫 질문이었다.
나는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시의 심정은 그랬다. 지금도 이해는 안 되지만.
"이번에는 인연이 아니더라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이름은 익숙한데 누군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너무 아쉬워 마시고요."
이해를 할 수 없는 면접관의 말이 끝나고 나의 면접은 10분도 채 되지 않은 채 끝났다. 교육경력이 충족이 안된다 하더라도 교육과 연구경력을 합쳐서 지원자격에 부합할 경우에도 지원자격이 충분하다고 명시가 되어 있음에도 인정받기가 쉽지가 않았다. 요구되는 교육경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경력으로는 충분히 충족된다고 생각했었다. 예전 유학시절 입학면접에서의 기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면접실에 앉아있던 면접관들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면 면접에서부터 이미 오고 가는 대화는 뻔했다. 면접실의 공기가 어떤지 느껴진다. 아쉬움보다는 분함의 기억이 가득했던 첫 면접을 뒤로하고 역 근처 햄버거 집에서 세트메뉴 하나를 시키고 한입 베어 먹는 순간 방금 전 면접은 금세 까먹는 단순한 나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누구나 다 겪는 과정이라 받아들이고 견디다 보니 학교 몇 군데 나가기 시작했는데, 겨우 시작했는데 이제는 학과가 없어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시작되는 요즘이다.
학교는 보장되는 사람을 뽑기 위하여 학위와 다양한 경력은 매해 불가결해지고 있다. 신입생도 줄어드는 판국에 더 확실한 뭔가가 필요해지고 있다. 학교에 출강해 보니 알겠더라. 난 작곡 및 전자음악을 전공했지만 전혀 상관없는 수업을 맡고 있는 학교도 있기에 하는 소리다. 멀티플레이어라도 되어야 하나 싶다. 그렇게라도 붙어 있으면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싶은 게 강사의 마음인지, 더 알찬 수업을 위해서 수업이 없는 날에는 책을 사서라도 따로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 생각된다. 나날이 경쟁이 심해지는 시대에 마냥 즐기며 가르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학교에서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수업시간에 앉아있는 학생들의 기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도 한 가지 느낄 수 있는 건 학위와 수업의 질 | quality(은)는 늘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정말 말 그대로 자신의 신분보장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고생해서 학위에 매진하신 전국의 선생님들의 노고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은 공부와 연구에 한계를 느껴 박사과정 1년을 끝으로 더 이상 하지 못했기에 그 길이 얼마나 고되고 쉽지 않은 길인지 잘 안다. 정말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지구상에 혼자 남은듯한 기분이었다. 여태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면 지금도 강사일을 하며 학생들과의 시간을 보내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짧게 고민하고 바로 진로를 변경한 건 살면서 제일 잘한 결심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유학시절 담당 교수님과의 대화에서,
"너희 한국사람들은 도대체 왜 박사학위에 집착하니?"
박사학위가 없으면 취업이 절대적으로 어렵냐며 귀국을 앞둔 나에게 많은 걱정을 표하셨다. 자신한테 유학의 의미는 해외에서 음악가로서 활동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외국의 대학에서 음악과 문화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사람들은 졸업만 하면 다들 귀국하기에 바쁘다고 했다. 물론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동양인으로서 콧대 높은 외국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는 건 해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한국사람의 열에 아홉은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그때 교수님의 놀란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람들마다 이 얘기가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나 자신은 박사학위를 한 가지 특정 분야의 명예로운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대부분 음악교수들은 음악가로서 혹은 예술가로서의 삶이 제1순위고 교직은 부수적이다. 학생들조차도 박사학위가 있는 교수의 모습보다는 음악가로서 최고 경지에 있는 모습을 보며 존경을 표한다. 거의 매달, 매해 자신의 연구분야를 음악회나 세미나를 통해서 발표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싶었다. 레슨을 통해 오고 가는 대화보다는 교수님의 연구실적을 쫓으면서 많이 배웠다.
예술인과 강사는 고정수입의 원천이 아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언젠가 지인이 나에게 했던 말이 또다시 생각났다.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건 나를 포함한 나의 가족이 걱정 없이 먹고살 정도와 기타 세금을 내고도 남을 정도의 고정 수입이 우선 있고 나서 그 외에 내가 추가로 버는 돈으로 하는 거라고 했다. 그만큼 어려운 길이라고 했고, 안타깝지만 예술은 모두를 위한 영역이 아닌 부유층들이 취미생활을 위한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나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은 남는 게 없을 거라고 했다. 이 나이가 들어서도 내 전공으로 순수하게 벌어들이는 게 없다면 더 늦기 전에 직종을 바꾸는 게 오히려 현명하지 않겠냐고 하더라. 내가 20년을 걸어온 길이 한순간에 무너지듯 무시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클래식 | Classic이라는 장르도 유럽의 부유층의 취미로 시작이 된 거나 다름없었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속상했는 듯.
어떻게 보면 몇 년이 걸렸던지 졸업을 하자마자 당연히 교단에 설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자체가 큰 욕심일 수도 있다. 내가 지식이 많은 것과 가르치는 건 또 다른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처음일 때가 있는 건 당연하지만 강단에 처음 몇 번 서보면 경력이 중요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면접관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강의 경력이 없다는 당연한 얘기를 했을 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한 것뿐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아야 한다. 몇 년을 그렇게 오래 버티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에 지쳐서 인내심이 바닥을 칠 때쯤 오더라. 그렇게 원하던 강사일을 한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지진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내 인생이 이제 슬슬 피기 시작하는구나 쉽게 생각하다 보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으니 오히려 더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알아야 한다.
한때는 누구나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었을 것이다. 인생의 목표란 게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더러 목표지점을 가능하면 처음부터 최대한 높게 잡을 수 있는 만큼 잡으라고 했다. 살다 보면 여러 이유로 타협하게 되고 처음 목표로 두었던 나의 목표점은 나이가 들면서 반비례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라나.
누군가에는 성공에 실패한 자의 쓸데없는 푸념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버티고 있다. 어디 가서 말 못 하는 얘기들 이렇게라도 써야 풀리지 않겠나. 오늘도 나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언제 연주될지 모를 새로운 작품을 쓰며 다음 도전을 위해 준비한다.
전국에 계신 강사선생님들 고생 많으십니다.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아웃트로 | Outro
어디 프리랜서 예술인으로나 강사로 살아가는 것만이 힘들겠냐. 더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위로삼을 수도, 위로 삼아서도 안된다는 주의다. 아무리 힘들어도 먼저 앞서간 다른 사람들의 인생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인생의 유사 | 流沙 (모래지옥, 퀵샌드 Quiksand) 같은 존재도 없기 때문에 내 인생에는 내가 아닌 남의 인생만이 남게 된다. 시작부터 과정을 거쳐 마지막까지. 내가 세운 목표는 내 손에 맞는 장비를 장착함으로 그나마 근처까지 도달할까 말까다. 우리는 아쉽기 때문에 뒤를 자꾸 돌아보게 된다. 인생은 늘 선택의 순간이기 때문에 그것 또한 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