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버스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by Gigantes Yang

아침 버스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20번. 내가 자주 이용하는 버스 번호.

아침에 운이 좋으면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93.1 라디오 방송.


평소에 즐겨 듣는 방송이라 피곤할법한 아침을 기분 좋게 깨워준다. 가끔은 오페라의 유명한 서곡이 잔잔하게 흘러나올 때도 있고, 브람스의 인터메초가 피아노 선율과 화성을 통해 버스 안을 가득 채울 때면 교통카드를 찍자마자 클래식 콘서트 홀의 울림이 가장 좋은 좌석을 구입한 기분이다.


전국의 모든 버스를 타보지 않았기에 다 그렇다곤 할 수 없지만 내가 사는 동네에서 정치방송이나 트로트 방송을 켠 채 달리는 버스는 다소 과격한 편이다. 급정차 급출발은 기본에다가 정차하면서 뒷문이 열린다. 내리고자 액션을 취하자마자 뒷문이 닫힌다는 신호음이 동시에 울리곤 한다. 심지어 신호등에 걸린다며 빨리 탑승하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신기한 건 사람을 봐가면서 대응을 하는 버스운전기사님. 타자마자 바로 출발을 하다 보니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신나는 트로트 가락. 누굴 놀리나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는 가사는 매번 신기할 뿐이다. 버스에서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들이 불쾌할 법도 하지만 큰 부딪힘 없이, 그리고 큰 사고 없이 미리 아침잠에서 깰 충분한 시간을 주는구나 생각하면서 넘어가고 만다.


정말 운이 좋으면 얼마 안 되는 거리동안 클래식을 들으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거의 대부분 음악을 끝까지 듣지 못한 채 내리기 때문에 죄 없는 정거장한테 왠지 모를 서운함이 생기기도 한다. 나중에 집에 가서 마저 들어봐야지 하면서 다짐을 하며 내리지만 하루종일 정신없이 보내서 그런지 아침의 그 황홀함은 똑같지 않다. 다음날의 행운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어쩌다 보니 매일 반복되는 희망고문이 되어버렸다.


버스를 탈 때마다 기사님께 간단한 인사 "안녕하세요",를 건넨다. 상대방의 반응을 꼭 기대하며 하는 행위는 아니다. 그냥 하는 인사다. 설마 나한테 안녕 못하다고 받아칠까. 시비를 거는 게 아니고서야. 단순한 인사를 함으로써 "저는 나쁜 승객 아닙니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잘 부탁드립니다",는 의미에서 할 뿐이다. 기사님께 드리는 인사의 의미는 나에겐 적어도 그렇다.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버스 방송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진행자의 목소리만 들어도 93.1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소에 즐겨 듣는 방송이 나오기만 한다면 서서 가면 어떻고 앉아서 가면 어떠하리. 안개가 자욱한 아침 버스 안에서 말러 | Gustav Mahler 향곡 3번의 피날레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급한 볼일만 아니라면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쳐서라도 음악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은 맘이다. 러의 음악을 처음 접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끊기가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빠져본 사람이라면, 혹은 그의 음악세계에 이미 오래전부터 심취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한번 접하고 나면, 그 마지막 음을 함께 경험해 봤다면 무언가에 홀린 듯 처음부터 빠져들게 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음악적 공간 안에서 헤맨다 한들 그 끝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현실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걸 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현실은 마냥 반갑진 않을 것이다. 버스 안에서 즐길 수 있는 그 짧은 시간은 나에게 그나마 허락된 소중한 시간임을 알기에 아침 버스 안의 클래식은 그 어떤 것보다 반가움의 존재다.

방송 진행자의 그날 음악선택이 나와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버스라는 공간 안에서 듣기에는 집중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클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숨소리를 죽이고 온몸의 신경을 양쪽 귀에 쏟아부어야 할 때가 있다. 그때만큼은 귀에 꽂은 이어폰을 잠시 벗어둔다. 존경하는 작곡가에 대한 나만의 최소한의 예를 갖춘다.


Spiegel im Spiegel | 거울 속의 거울 (작곡가: Arvo Pärt | 아르보 패르트)


실황으로 들어본 적은 없다. 유튜브를 제외하고는 라디오에서 몇 번. 그리고 영화 어바웃 타임 | About Time에서. 잔잔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음악.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새벽 기차 안에서는 마음을 진정시킬 무언가가 필요하다. 잠이 한참이나 덜 깬 상태에서 새벽 첫차를 타야 한다면 분명 어딘가 멀리 가야 한다는 소리겠지. 핸디에 저장된 음악, 거울 속의 거울 | Spiegel im Spiegel. 장거리 여정에 자주 듣는 음악. 현대음악이지만 굉장히 조성적이고 단순함과 기본적인 음악적 소재로 절제되어 아침의 피곤함을 달래준다. 정적이고 잔잔함 속에서 나에게 편안함을 찾게 해 주는 몇 안 되는 아침의 음악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음악이 흐르는 아침에 눈을 감고 있다 보면 나의 영혼은 그 음악의 물결 어디엔가 행복이 가득한 채 떠돌고 있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은 음악세계의 차원으로 유체이탈하여 넘어가있던 나를 다시금 현실로 돌아오게 한다. 음악 속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클래식일 필요는 없다. 클래식은 나의 경우일 뿐. 목적지까지 10분이어도 좋고 2~3시간 거리가 되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 나만을 위한 음악 하나면 된다. 잔잔한 음악이어도 좋고 다소 시끄러운 음악이어도 좋다. 목적지까지 나를 편하게 해 준다면 그걸로 된 거다.


말소리가 없는(가사가 없는) 음악이면 더 좋다.


어차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종일 지긋지긋하게 듣게 되는 게 말소리다. 직장에서나 특정 모임에서, 혹은 길거리에서나 내 귀를 괴롭힌다. 원하는 대화가 아니면 내 귀를 끊임없이 피곤하게 만든다. 지금 내 앞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상대방이 꼭 싫어서도 아니다. 잠들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의 두 귀는 그렇게 하루종일 누군가의 소리를 담아내느라 피곤에 지쳐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지로 향하는 그 길만큼은 대화가 없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평온함. 그게 필요하다. 잠시라도 좋을 잔잔함. 그만큼 음악은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힘이 있다. 하루종일 버틸 힘을 준다.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부터 하루의 일과가 진정으로 시작된다.


나의 하루 일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는 나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허용한다. 어차피 내릴 곳은 정해져 있다. 정거장 방송 따위는 들을 필요가 없단 소리다. 그 잠깐을 놓치면 안 된다. 아직 5 정거장 남았다. 잠깐동안 음악세계로 나를 맡길 시간은 충분한 듯하다.


오늘도 덕분에 힘을 낸다.




Outtro.


그 밖의 추천곡 3곡...


1. 스트라빈스키 | Igor Stravinsky: 불새 | Fire Bird

전곡을 듣는 것을 권하지만 마지막 부분의 Final Hymn 흘러나오는 호른의 매력적인 멜로디가 음악의 끝으로 어떻게 안내하는지 확인해 봐도 좋다. 폭발적인 에너지로 이끌어 가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면 강추. 길어봤자 3~4분이다.


2008년 루체른 페스티벌 | Lucerne Festival

지휘 클라우디오 아바도 | Claudio Abbado

연주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 Lucerne Festival Orchestra

*유튜브를 통해 마지막 부분을 찾고자 한다면 대략적으로 17:56~7 (영상 전체길이 21:29) 지점이 될 듯.


2. 말러 | Gustav Mahler: 교향곡 6번 3악장 | Symphony 6, 3rd Movement

말러를 접해보지 않았다면 다소 어려운 곡이 될 수도 있는 말러의 6번 작품. 개인적으로 말러의 작품 중 가장 선호하는 교향곡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중에서도 3악장이 말러 교향곡의 느린 악장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의 교향곡 4번의 3악장이나 교향곡 5번의 4악장을 선호하며 가장 아름다운 악장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맞다. 교향곡 4번의 3악장과 교향곡 5번의 4악장은 처음부터 이미 선율과 화성에 매혹된다. 첫 시작부터 음악에 미친 듯이 빠져든 상태에서 기승전결이 있다. 경험자라면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6번의 3악장은 처음 부분에서 들려주는 선율과 음악적 상황은 단순히 맛보기에 불과하다. 자꾸만 궁금증을 유발하며 자연스럽게 기승전결을 유도한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음악이 시작된 이상 끝을 보게끔 만든다. 왜 그런지 이해하려면 우선 교향곡 6번의 3악장을 먼저 들어보고 그다음에 1악장부터 순서대로 들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참고로 말러의 교향곡 6번 교향곡은 장거리 용으로 자주 듣는다.


누구의 지휘던 크게 상관없이 다 훌륭하다. 그중에서 꼽으라면 게오르그 솔티 | Sir Georg Solti, 클라우디오 아바도 | Cluadio Abbado, 리카르도 샤이 | Riccardo Chailly 정도가 되겠다. 정명훈 지휘자의 해석도 나름 매력이 있다.


3. 쇤베르크 | Arnold Schönberg: 현과 하프를 위한 '녹턴' | Notturno for Strings and Harp

무조음악 | atonal music 혹은 음렬주의 | serialism 하면 떠오르는 작곡가는 대부분 쇤베르크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성음악 | tonal music 어법에도 훌륭한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그중 꽤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녹턴'. 쇤베르크 자신은 문자 그대로 조성적 중심이 없는 무조음악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조성(기능화성적 조성)을 거부했을 뿐이지, 넓은 의미의 조성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음악을 들어보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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