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누구나 음악을 즐기고 마음만 먹으면 음악가가 될 수는 있지만 사회적 지위나 돈이 없으면 악보도 살 수도 없고 악기는커녕 레슨조차도 받을 수 없던 시대가 있었다. 기록된 역사를 그렇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그 흔하디 흔한 종이 | paper 조차도 당시엔 부의 상징이었을 때가 있었다고 하니깐.
역대 국제 음악콩쿠르에서 매해 한국사람들이 많은 분야에서 입상을 차지하고 있는 거 보면 그만큼 한국에서 실력 이상으로 신분보장이 예술계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클래식을 찾는 관객들은 날이 갈수록 음악적 퀄리티를 더 기대하다 보니 더 유명하고 스타성이 있거나 콩쿠르 입상자들의 연주를 더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기존의 명작들 혹은 명연주자들에 의한 공연을 찾는다. 내가 피아노를 기본이상은 칠 줄 아는 것과, 실력을 인정받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니깐.
어디 여기서 끝일까.
예술가들은 무대 위에 서기 위해서 학위가 이전보다 더 너무나도 중요해졌다. 나를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나의 무엇을 보고 연주를 보러 올까. 단순히 연주되는 곡목이 취향이라서? 아니다. 학력과 경력을 반드시 본다. 어디서 들어본 대학교면 일단 평균은 갈 것이다. 어디선가 들어보지 못한 입상경력이라 해도 이력서에 한 줄 있고 없고에 작은 차이가 생긴다. 누구에게는 위압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래도 내가 그동안 마냥 놀고먹으며 살지 않고 노력했다는 걸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에 굉장히 소중한 한 줄이다. 공연을 찾는 사람들이 그날 프로그램 책자를 보지 않는 것 같아도 공연에 대한 설명과 출연하는 모든 출연자들의 이력을 다 읽어본다. 읽지 않는 것 같아도 다 본다. 누구의 공연인지 뻔히 알면서도 연주 전이나 중간중간에 프로그램을 읽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이 기획될 때 프로그램 책자에 이목을 끌기 위해 최대한 투자한다.
다양한 디자인, 최고 화질의 사진, 그리고 출연자 혹은 출연단체의 화려한 이력.
이 모든 건 종이 위에 또다시 기록되어 저렴하게는 관객들에게 오천 원에서 만원에 판매된다. 무료로 배부될 때 보다 적은 돈을 주고 구입을 선호하는 것도 공연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공연장의 좋은 자리를 구입하는 것 이상으로 프로그램 책자를 구입하는 것이 된다. 종이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어마무시하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란다. 예술가는 사람들의 입으로 돌고 도는 소문 이상으로 종이 위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에 따라 티 나지 않게 새로운 이미지가 입혀지게 된다. 이력에 고작 학위 한 줄이 전부였던 10년 전과 비교해 보면 나 조차도 스스로에게 그동안 참 열심히 달려왔구나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이전보다 프로필에 더 신경 쓰게 된다.
어쨌거나 하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공연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은 연주자로서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작곡가로서는 본인의 작품이 연주되는 것이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되겠다. 내 경험으론 그렇다는 얘기다. 클래식이나 현대음악 공연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내용이겠지만 프로그램 책자를 열어보면 연주자들의 이력은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다. 이미 이들의 학력은 화려하다 못해 어마무시하다. 반드시 명문대를 나와야 하는 것도, 유학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석박사는 기본에 유학파가 대부분이다. 어디 그뿐이랴, 화려한 그들의 입상 및 연주 경력은 관객들로 하여금 관심을 더 갖게끔 만든다. 현재 어디에서 강의를 하는지, 어느 협회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는지도 빠질 수는 없다. 과거의 경력과 이력도 중요하지만 현재 어느 분야에서 무엇을 하며 활동을 하고 있는지는 절대적이다. 혹시라도 내 연주가, 내 작품이 마음에 들었거나 흥미가 생겼을 때 '나'라는 사람을 다시 찾기에 좋은 지표가 되어줄 것이다.
[2022년 당시 출강하던 작곡과 졸업연주 심사]
결국에는 음악가에게 (혹은 모든 예술분야에) 이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리지만, 한 번은 이런 이력을 본 적이 있다.
OO 마스터 클래스 만장일치로 최고점수 수료, OOO 사사
만장일치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졸업시험 혹은 졸업연주, 콩쿠르의 심사과정에서 모든 심사위원의 의견이 동일하게 반영되었을 때나 쓰인다. 사사라는 표현도 스승을 섬기는 의미로, 주로 특정 학위 과정(학사, 석사, 박사 등)에서 나의 전공교수로 보는 것이 더 맞지 않나 싶지만, 분명 이력에 많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프로필 한 줄 한 줄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에 굳이 긴말은 하지 않겠다.
나의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반드시 얘기하는 게 하나가 있다. 이제는 학력만 가지고는 어디에도 '나'라는 사람을 불러주는 곳은 잘 없을 거라고 말해준다. 뭐가 됐든 내 전공과 관련 있거나 나의 활동범위와 연관성이 증빙될 수 있는 이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설명해 준다. 크던 작던 중요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졸업 전에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할 것을 권한다. 선택은 결국에 본인들의 몫이겠지만, 학생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시기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얘기한다. 학생때 할 수 있는 경험과 학생이기에 허용되는 실수는 얼마든지 경험해 보라고 한다. 졸업하고부터는 나를 특정분야의 전문인으로 평가하고 대우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학생 때 쌓아둘 수 있는 내공은 최대한 모으는 게 좋다고 한다. 아무래도 다양한 패가 많을수록 기회를 잡기엔 유리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이런 종이쪼가리 하나 받을라고 내가 이란 고생을 했나 싶었지만, 이제는 이거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하고 다행이라며 스스로 안도한다.
나의 경우는 작곡으로, 내 거만 잘해서 통하던 시대는 갔다(내 거라고 하면 나의 주종목 혹은 주전공을 의미한다). 나는 그동안 주로 현대음악 작곡을 본업으로 해왔지만 그거 하나로는 한계에 금방 다다르게 되었다. 세상을 기준으로 보면 당연하지만, 국내에서만 봐도 너무나도 곡을 잘 쓰는 사람도 넘쳐나고 비슷한 음악을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곡을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이전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더 튀는 게 쉽지 않아 졌다. 곡을 잘 쓴다는 기준이 콩쿠르에서 우승한 결과에 따른 것인지, 관객과의 음악적 공감대를 잘 형성한 데서 오는 것인지는 기준이 매번 다르지만, 순수하게 완전히 '음악'실력만으로 통하던 때는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된다. 그런 시절이 과연 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내가 증빙할 수 있는 이력의 유효기간을 3년으로 제한되고 있는 시점에서 매년 무엇으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지만, 뭐가 되었건 음악가에게도 이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내 결론이고,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짧은 한 줄 하나에도 스스로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게 내 요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