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gantes Yang Aug 06. 2023

지긋지긋한 학교폭력

왜 가진 힘을 엉뚱한 곳에 쓸까

지긋지긋한 학교폭력


정말 시대가 변해도 끊임없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정말 간단히 생각하면 쉽다. 상대방이 똑같이 장난이라 생각해야 장난이다. 상대방이 싫다는데도 계속하면 그건 고문이고 폭력이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서 서로 생각하는 정도가 같을 수는 없다.



1. 학생 vs 학생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표현. 그리고 싫어하는 어른들의 표현 중 하나. 왜 누군가는 희생당하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 그 기준은 누가 정했을까.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해자도 똑같이 당해봐야 조금이라도 정신 차린다고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하는 사과는 정말 어렵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게 있다면 한번 무너진 믿음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이가 들면서 나의 입을 무겁게 만드는 게 사과다. 나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쉬워 보이지만 동시에 정말 어렵다.


어릴 때 친구끼리 장난도 치고 다투기도 한다. 형제끼리도 그러는데 바깥에 나가서 안 그럴까. 집에서와 다르게 수위가 달라진다. 어려서는 갖는 감정이란 것은 뭐든 다 처음이기 때문에 몸과 정신에서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가끔은 모를 때가 있다.


뭘 알고 이런 얘기하냐 싶겠지만. 그렇다. 겪어봤다.


부유한 집이던 아니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가정환경이다. 그다음은 어느 지역, 어느 학교를 다니는 가이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친구를 사귀는 일이고 집단을 형성한다.


학교 가서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렴.


내가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 아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부모님께서는 늘 말씀하신다. 친구들과 싸우지 말라는 말. 그리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 그래, 어느 정도 '사이좋게'는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본 같은 반의 동급생과 하루아침에 친해지기란 누군가에게는 여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사교성이 유독 좋은 성격일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아가는 성향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작은 차이에서 이미 학급의 무리는 갈리게 된다. 그 외에도 운동을 좋아하는 무리들,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 일찍이 이성에 눈을 뜬 아이들부터 해서 키와 덩치에서 갈리게 되는 무리들까지 다양하게 학급이 어느 순간 나뉘게 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들만의 영역이 형성된다.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반대로 모든 영역을 침범하고 헤집고 다니는 무리들이 꼭 한 반에 있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는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소위 말해서 '학교 폭력'의 중심에 있던 아이들이었다.


학교에서는 주로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크게 친구들끼리 그럴 수도 있다고 하거나 당한쪽도 잘한 건 없을 것이라고 쉽게 결론을 내리곤 한다. 원래 남자들은 크면서 친구들하고 치고받고 싸우면서 크는 거라고도 한다. 왜 항상 치는 쪽과 맞는 쪽이 정해져 있을까 싶을 때가 있었다. 정말로 나에게도 문제가 있어서였을까. 


[수업 전에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며: 교육자로써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가 항상 고민이다]


당하는 쪽에 있어보니깐 썩 좋진 않았다고 기억한다. 


물론 어린 마음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되돌려 주겠다는 복수심도 가져본 적도 있었다.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은 없었지만. 두 번 다시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를 최대한 보호하자는 심정으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나를 건드릴 경우에만 가해자가 되어본 적도 있지만 그것만큼 후회가 되는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인간관계에서 크게 연연하지 않게 변해온 것 같다. 굳이 억지로 친해지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부러 멀어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이 관계에서 밀어낸다고 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나부터 보호하자, 나부터 챙기자 하다 보니 사람에 대한 기대감도 낮출 수 있었고, 상대방으로 부터 받는 상처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 평판이나 주변 인식이 어떻든 나하고만 문제가 없으면 별문제 없이 지내왔다.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2023년 1월: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떠오른 질문, '어떤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모든 학급의 사람들과 친구일 수는 없다고 본다.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서로 싸우지 않는다고 해서 친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라면 서로 부딪힐 일도 없지 않을까 싶다. 냉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공감 가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를 보호하는 것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나만의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가는 친구는 잘 없기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에 관계에 있어서 크게 담아두는 것도 없다. 


학교 폭력, 참 단절시키기 어렵다. 문제를 일으키는 누군가를 그 무리에서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는 예상치 못하게 또다시 발생한다. 거의 그래왔다. 모두가 생각하는 문제를 기준 삼기 시작하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조금이라도 발생하기만 해도 다들 들고 일어설 것이다.


이제 와서 진심 어린 사과는 굳이 필요 없다. 그거 아니어도 잘 지낸다. 그냥 마주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까. 옛날얘기 꺼내면서 한대 크게 쥐어박을 수는 없겠지. 아마 기억조차 못할 것이란 걸 알고, 나도 아무런 감정조차 남아있지 않기에 그냥 넘어가련다. 어디선가 사고 치지 말고 잘 살아라.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2. 교사 vs 학생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참 많이 맞았다. 억울했던 적도 분명히 있었지만, 대부분 선생님들의 기준에서 잘못을 했기 때문에 맞았다. 다시 말해서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맞은 것에 대한 서운함은 없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체벌이 있었기 때문에 무서울 때도 있었고 반항을 할 때도 있었다. 


가장 어이가 없었을 때는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바로 잡아준다는 의미에서 선생님께서 본인 나름의 관심법을 사용하셨는데, 누가 칠판 앞에서 나가 반 앞에서 혼이 나는 것을 즐기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 싶다. 나로서는 억울했기에 나의 차례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다시 원위치를 시키셨다. 이유는, 훈육에 대한 감사인사를 안 했다는 이유였다. 나의 분량은 처음부터 다시 초기화되었다. 학생들이 제발 인사 한번 하고 끝내자고 눈치를 줬지만 그 당시 억울했던 나는 끝까지 버텼다.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나는 교무실로 불려 갔고, 학습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장문의 반성문과 추가된 훈육이었다. 과학수업시간 때 선생님이 내준 퀴즈에 대답하지 못했던 게 내 잘못이었다. 나이가 드니깐 그냥 다 웃픈 기억이고 추억일 뿐이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그러했으니,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지낸다. 


교육자로써의 권위를 이용해서 학생들에게 일종의 갑질을 하는, 해서는 안될 필요이상의 행동이 소수의 교육자들로부터 계속해서 일어난 것도 한몫을 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나 신체접촉에 의해 이뤄지는 그 어떠한 체벌조차도 엄격하게 금지되고 사회에서 다뤄지는 게 아닐까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학생 입장에서 인격적으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거나 약간의 잔소리조차도 체벌로 분류해 버리기 때문에 모든 게 조심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체벌을 반대하지도, 그렇다고 찬성하지도 않는다. 다만, 교육자로써 할 수 있는 학생과의 건강한 관계의 거리가 형성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교육자의 입장에 서보니 나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 내 입에서 나오는 표현 하나하나가 굉장히 조심스럽다. 나의 표현으로 인하여 학생이 바라보는 세상과 어른에 대한 시선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냉정 할 땐 냉정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생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Outro


'폭력'이란 학교라는 영역에서만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학생들 간의 폭력, 교사와 학생 간의 폭력을 포함하여 문제발생의 근원지를 찾는다 하더라도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체적 혹은 정서적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말은, 폭력도 학습이 되기 마련이고 방치하면 당연히 안 되겠지만 해결된다 하더라도 또다시 언제 어디선가 터질 수도 있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당하는 쪽에 있어보면 굉장히 괴롭다. 나는 다행히 넘어섰지만, 썩 좋은 기억은 정말 못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잊고 살았던 웃픈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