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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gantes Yang Mar 16. 2023

혼잣말, 그리고 혼자 놀기

혼잣말, 그리고 혼자 놀기


지금은 없어진 걸로 알지만 강서구에 위치해 있던 군인아파트에서 초등학교 시절의 일부를 보냈는데,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잦았다.


하교를 하고 집에 도착해서 아무도 없으면 경비실에서 열쇠를 찾아가면 되는 하굣길은 어린 나에게 익숙한 루트였다. 나와는 다르게 사교성이 워낙에 좋았던 형은 학교가 끝나면 늘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 들어오는 일이 빈번했기에 2살 차이의 형과 나는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늘 달랐다. 오락실, 운동장, 친구네 집. 형제가 있는 집에서 많이들 공감할 수도 있겠지만 한두 살 터울의 형제는 잘 붙어 다니지 않는다.


당시 군인아파트 특성상 경비아저씨를 포함해 단지 내의 PX 관리인조차도 모두 군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에겐 이미  익숙했던 부대 냄새 투성이었다. 쇠를 받으러 오는 내가 익숙했던지 경비아저씨께서는 손으로 알아서 꺼내가라고 하실 정도였다.


하루는 형이 어떤 사정으로 학교를 나가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날도 나는 당연한 듯 아무도 없는 집 현관문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경비실에서 열쇠를 받아왔다. 보통은 저녁식사 때면 어머니나 형이 집에 있었기 때문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는 오시겠거니 하며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아버지께서는 다른 나라로 단기 파견근무를 가셨을 때라 집은 대부분 조용한 편이었다.


19시가 넘었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항상 늦으면 전화를 주시던 어머니께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으셨다. 근데 형은 왜 안 오지 싶었다. 어려서는 겁이 많았던 아이였기에 캄캄한 밤에는 절대 혼자서 나가지도 못했다. 지금은 아파트 복도에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시스템이 일반적이지만 그때만 해도 어두운 암흑 속에서 직접 스위치를 켜고 껐어야 했기 때문에 유난히 어두운 날에는 집까지 소리를 최대한 지르며 통로를 지나 뛰어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겁쟁이 유명했다. 현관등 따위도 없었다.


20시가 넘었는데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핸드폰도 문자시스템도 없던 시절에 누군가에게 연락을 한다는 건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너무나도 큰 과제였다. 번호를 외울 줄도 몰랐다.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서러워지기도 했다. 조금씩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마루 소파에 앉아서 날이 저물어 가는 것도 나중에 눈치를 채서 그런지 현관문 쪽에 위치한 거실등 스위치까지 가질 못하겠더라. 불과 한두 걸음의 거리였지만 모든 방은 문이 활짝 열려있는 채로 캄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불을 켜려고 일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둠 속에서 공포는 무서울 정도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서럽게 울던 아이는 목청이 떠나가게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전화는 여태 울릴 생각조차도 아무런 미동조차도 없었다.


21시가 넘었다. 아이의 옷은 이미 눈물로 흠뻑 젖은 지 오래다. 무서우면 눈을 감고 있으면 되지 않냐 하겠지만 홀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눈을 감았다가 뜬다는 건 있을 수 없다.


22시가 넘었다. 누군가 문을 열고자 한다. 누군지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 없이 문만 열려고 한다. 내 목소리가 닿지 않았나. 소리를 더 질렀다. 문안 쪽에서 추가로 잠가버렸기 때문에 열릴 리가 없는 문이었다.


정신없이 울고 있는 와중에 현관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거 들렸다.


"엄마야, 문 좀 열어주렴."


마지막 용기를 내서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순간 문 넘어의 존재가 가족이 아니면 어쩌지 싶었다. 어둠 속에서 문은 열렸고 익숙한 사람냄새를 풍기는 누군가가 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형체는 신발장 옆의 거실등을 켰다. 어머니와 형이었다.


몇 시간을 울어댔으니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나를 보며 형은 그렇게 울일이냐며 놀려댔다. 어머니께서는 미안하셨는지 다음날 죠리퐁 한 봉지를 건네주시면서 용감하게 집 잘 지켰다며 안아주셨다. 평상시면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뺏어먹던 형하고 싸웠겠지만 이번만큼은 혼자 다 먹었다. 고작 그거 하나에 퉁치겠냐고 하겠지만 난 죠리퐁을 정말 좋아했다.


버스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큰 이모댁에 다녀오시는 길이었다고 어머니께서는 설명해 주셨다. 얘기가 길어지다 보니 시간이 간 줄 몰라서 급하게 나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차가 너무 막혀서 늦었다고 하셨다. 급하게 챙겨 나오느라 전화를 못하셨다고. 형도 당시엔 어린 나이였기에 종일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 같이 다녀오셨고 하시더라.


어릴 때야 워낙에 겁이 많았어서 늦은 시간(어린아이가 생각하는 늦은 시간이란 기준이 다를 수 있겠지만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쯤이라고 보면 되겠다) 혼자 있으면 이불을 뒤집고 있던지 방안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켠 채 조용히 있곤 했다. 아무리 방광이 터질 정도로 오줌이 마려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굳게 닫힌 문은 혼자 집에 있는동안만큼은 절대로 열리는 일은 없었다.


당시에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군인가정이 흔하진 않아서 대부분의 하굣길에 같은 방향의 친구는 잘 없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익숙했던 혼자만의 하굣길, 그리고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잦았기 때문인지 혼자라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혼잣말을 하며 혼자 놀기를 터득한 것 같다. 이름을 붙여주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지만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친구처럼 잘 지냈다.


때로는 전우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상황극도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대부분 지구를 지키는 일이었다. 옆에서 들어보면 말도 안 되는 대화가 대부분이었겠지만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 어둠 속의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해 나갔다. 물론 어둠이라는 대상의 공포심을 완전히 극복하는 데에는 일주일 동안 매일 경험했던 초현실적인 가위눌리기가 큰 한몫을 했지만.


차 안에서나 집에서나 가족들이 함께 있어도 혼잣말, 혼자 놀기는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까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런 나를 보면서 형은 혼자 놀기의 대가라며 얜 어디에서나 혼자 둬도 잘 지낼 거라며 놀렸지만,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릴 때부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서 그런지 커서도 외로움을 잘 못 느끼고 살았다. 중고등학교 이후부터는 혼잣말이나 혼자 놀기는 많이 없어졌지만 상황에 따라서 필요하면 유용하게 써먹게 되었다.



큰 발표를 앞두고 있을 때.

방 안에서 발표연습을 하기 전 내 앞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다. 물론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지만. 미리 느껴보는 긴장감은 도움이 많이 되더라.


면접을 앞두고 있을 때.

몇 번의 시나리오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내 앞에 거울을 두고서 연습을 한다. 가상 면접이 진행되는 동안 면접자 입장도 되어보고 그런 나를 지켜보는 면접자의 표정도 거울을 통해 읽어보며 반응해 보기도 한다. PR도 해보고 지적도 해보고.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이 어색하지 않고 막힘없다고 느끼신다면 실전에서도 문제없더라. 거울 속 내 모습이 결국엔 면접장에서의 내 표정이더라.


앙상블 혹은 오케스트라 지휘연습을 앞두고 있을 때.

가상의 오케스트라 배치를 해본다. 방안에는 아무런 음악도 흘러나오지 않지만 악보를 통해 들리는 연습소리에 반응하며 가벼운 멘트도 던져보고, 부분연습도 시켜본다. 작품 속 음악을 정리시킴과 동시에 다음날 잡혀있는 리허설의 스케줄도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정돈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어둠 속에서 혼자 남겨졌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했던 혼잣말과 혼자 놀기.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유용하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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