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귀국한 나는 이미 서른 살 끝을 달리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를 반긴 코로나 덕분에 반년 가까이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귀국 후 몇 년은 이곳저곳 대학교 강사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끔씩 좋은 기회로 위촉 작곡가로 일할 때 생기는 부수입은 정말 마른땅에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내는 아내대로 굉장히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둘 다 정신없이 보내는 와중에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길 거라고는 기대 자체를 안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뭐, 시도조차도 할 여유조차 없었으니깐.
우리 부부는 각자의 삶에 집중하며 고생하다가 작년 초에 감사한 일이 생겼다. 한국에 돌아와 아내와 둘이서 살던 곳이 계약 만료가 되면서 우리 부부는 새로운 터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둘 다 생전 처음 살아보게 되는 지역에서 좋은 일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집 주소가 바뀐 다음 해 초에 아내 뱃속에 새 생명이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초음파 사진을 통해 처음 본 아기집 사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자그마한 공간에서 우리 딸이 자라 태어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2023년 초, 아이가 아내 뱃속에 들어선 순간부터 출산 전까지 엄마 뱃속에서 조금씩 자라는걸 초음파를 통해 보면서 아빠가 되었음을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출산일이 다가오면서 아내의 배는 터질 듯이 커져만 갔고, 연말이 되어서야 세상 밖으로 나올 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딸이 태어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의 발꼬락 사진]
제발 엄마 얼굴만 닮아라, 제발 엄마 얼굴만 닮아라.
매일같이 외운 주문이었다. 다행히도 코 빼고는 엄마를 거의 판박이 수준으로 닮은 딸이 태어났다. 아내와 함께 회복실에서 갓 태어난 우리 딸을 맞이했을 때를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싶다. 슬로 모션이 제대로 걸려서 몸 주위에 빛을 내며 엄마 아빠에게 모습을 드러낸 우리 딸은 인형이 살아 숨 쉬는 듯 굉장히 작고...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이 안될 정도였다.
나이 40이 넘어 생긴 첫 딸.
막상 아이가 생기고 나니깐 조금이라도 젊을 때 가졌어도 좋았겠다 싶더라. 이유는 바로 체력 때문. 적어도 100일 때까지는 우리 부부가 둘이서 육아를 해보자 했지만 70일이 넘은 지금까지 오기까지 쉽지만은 않은 여정이었다.
아직 한참 멀었겠지만, 아이를 다루는 게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딸도 그런 엄마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수유텀과 수면시간도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는 없지만, 낮과 밤 구분을 어느 정도 하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었다.
아직은 많이 서투른 초보 아빠이지만 대체적으로 매우 협조적(?)인 딸 덕분에 매일이 행복하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재미가 이런 건가 싶다. 아내와 둘이서 우리는 노예 1, 노예 2 라면서 뭐가 그리 웃기는지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깔깔 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엄마 아빠의 재롱(?) 잔치를 보면서 살인 미소를 연달아 선사해 주시는 딸 덕분에 체력이 자동 충전되는 요즘. 눈에서 꿀 떨어진다고 대야 가져다주냐고 하는 아내. 심지어 옹알이가 부쩍 늘었고, 시야가 많이 확보되었는지 주변 환경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딸의 생활 반경이 조금씩 넓어지고 활동량이 늘어남에 따라 아빠인 나도 덩달이 아이의 변화에 맞추려다 보니 체력 소모량이 이전보다 많아진 걸 느낀다. 처음에 육아하다 보면 아빠들은 힘들어서 살이 많이 빠진다고들 하는데, 나는 오히려 먹는데에서 힘을 얻기 때문인지 빠지긴커녕 유지가 되고 있다.
어제는 딸과 단둘이 보내며 아빠 품에서 잘 자고 있는 딸의 이마를 쓰다듬다가 눈물이 흐르더라. 문득 내가 우리 딸에게 좋은 아빠일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다소 늦은 나이에 아빠가 되어보니 참 쉬운 게 하나도 없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