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사업계획서 쓰기 - I

귀농 사업계획서는 스타트업 창업 처럼

by 영태

직장 생활을 할 때 매년 10월즈음이면 내년 사업계획서를 쓰기 시작했다. 마케팅 분야다 보니, 올해는 어떤 흐름이었고, 어떤 효과가 있었으며, 내년에는 어떤 이슈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며, 돈 얼마를 써서 얼마의 성과를 낼 것인지. 어느 정도 정형화된 구조였다.


지난 4화에서 귀농 사업계획서는 긍정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고 했는데, 직장도 마찬가지다. 그룹사 사장단까지 올라가는 보고서에는 부정의 언어가 없었다. 있더라도 최소화한다. 거짓 없이 사실로 가득 채우더라도 그렇다. 귀농 사업계획서는 정책자금이나 저리 대출을 얻기 위한 문서이니 당연히 긍정의 언어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귀농 후 얼마 지나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후배, 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귀농지원사업 같은 것에 직장을 다니며 신청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만두고 준비하다 떨어지면 어떡하냐는 걱정이었다. 나는 청년창업농과 귀농 농업창업 지원사업, 두 가지에 모두 지원했고 둘 다 됐다. 청년창업농이 먼저였고, 주택 관련 융자 사업은 그 다음이었다. 그외 작은 지원사업들도 운이 좋게도 계속 통과가 되었다.


사실 귀농 사업계획서를 쓰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매년 사업계획서를 써왔어도 농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무엇을 채워야 할지 막막할 수는 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귀농 관련 사업계획서는 대부분 목차와 형식이 정해져 있다. 가장 대상 범위가 넓은 귀농 농업창업 지원사업(3억 대출, 5년 거치 10년 분할 상환)의 목차는 대략 이렇다.


현황 : 인적사항 등

영농기반 : 현재 영농 규모 등

기 정책자금 대출 현황

사업계획 : 사업비 투자계획, 세부 추진계획, 자금조달 계획, 향후 계획

융자금 상환 계획

지역 활동 참여 계획


구조는 크게 두 가지다. 현재 상황을 적는 것과 앞으로의 계획을 적는 것. 현황은 있는 그대로 쓰면 된다. 공을 들여야 하는 건 앞으로의 계획 부분이다.


1. 사업계획서는 정확하지 않아도 된다


농업에 대해 모르는게 많은 어떻게 사업계획서를 적어냐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은 스스로 정확하지 않다는것에 대한 불안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귀농 사업계획서를 정확하게 적는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현재 본인의 상황에 따라서는 이미 귀농을 해서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아직 이사를 오지 않은 귀농 이전의 상태 일수도 있다. 물론 이런 류의 사업계획서를 제출해야하는 단계에 왔으면 어느정도 준비가 된 상태이겠지만, 농지구입, 시설 설치 등은 계약이 오가기전엔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정보로 채우면 된다. 농지 구입의 경우 아직 계약 이야기가 오가기 전이라면 부동산 앱(나는 디스코를 썼다)으로 희망지 인근의 최근 거래 이력을 확인해 기재했다. 시설은 몇 군데 업체에 연락해 견적서를 받아 근거로 삼았다.


사실 사업계획서를 쓸정도의 단계라면 어느정도 귀농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경우일 것이다.



2. 추진계획은 차별화가 필요하다


5년 이상의 향후 계획을 적을 때, 농지 구입하고 시설 만들고 작물 수확하는 흐름에 비용과 수익만 적어도 형식은 갖춰진다. 하지만 기본적인 계획을 넘어서야 매력적인 사업계획서가 된다.


나는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것처럼 접근했다. 스타트업 붐이 일던 시기에 유행했던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를 활용해 앞으로의 귀농과 창업 방향을 정리했다.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는 핵심 파트너, 주요 활동, 가치 제안, 고객 관계, 수익 구조 등 9가지 항목을 한눈에 정리하는 도구다. 농업은 어쩌면 뻔한 비즈니스처럼 보이지만, 각자가 가진 자원과 방향에 따라 모델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비즈니스모델캔버스.png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



면접에서 확실히 분위기는 달랐다. 이미 정해진 답 위에 숫자만 채워 온 계획서와, 자기가 어떤 방향으로 농업을 할 것인지 구조를 가지고 온 계획서는 다르게 읽힌다. 면접관도 사람이다.


그외에도 어떻게 농부로써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는것도 좋다. 농부가 되고자 하기 전 개인이 가진 경험과 능력이 지역사회에 어떤 형태로 녹아들고 기여할 수 있는가도 매력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3. 면접은 사업계획서의 연장이다


지원 사업에 따라 경쟁 강도는 다르다. 어떤 사업은 결격 사유만 없으면 면접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면접에서 난다. 면접은 결국 사업계획서를 기반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계획서가 잘 준비되어 있을수록 면접관의 관심을 더 끌 수 있다. 사업계획서를 쓰는 과정 자체가 면접 준비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업계획서 통과와 대출 실행은 별개의 문제다. 선발이 됐다고 원하는 금액이 그대로 나오는 게 아니라, 이후 농협 심사를 다시 거쳐야 한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4. 귀농 지원 사업을 바라보는 담당공무원의 입장은?


당연하게도 각 지원사업은 담당부서와 담당 공무원이 있다. 모든 지원사업에 해당되진 않지만, 특히 지원사업의 예산의 성격이 기초 단체의 자체 예산이 아니라 광역 단체 예산 (도비)이 섞여 있는 경우에는 선발된 이후에는 실제 그 예산의 집행 여부가 더 중요해진다. 집행이 확정된 예산을 제대로 쓰이게 하는 것은 그들의 일이 된다. 실제로 배정시킨 예산이 집행되지 않는다면 집행되지 못한 이유를 상위 단체에 말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차후 년도 사업비 배정에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나에게도 신신당부 하기도 했다.)


담당 공무원 입장에서는 처벌이 있다거나 불이익은 없겠지만 이 자체가 번거로운 일이다. 허황되거나 신뢰감이 없는 사업계획서는 그들에겐 잠재적인 일거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일이다.



그래서 사업계획서는 무엇을 위해 쓰는가


통과를 위해서다. 그건 맞다. 하지만 좋은 사업계획서는 그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귀농 이후에 실제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를 스스로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귀농 사업계획서는 설득문서이면서도 생존 설계도이다. 그래서 나의 사업계획서는 아직도 업데이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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