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불안이라는 이름의 물가에서

불안도 또 하나의 나

by 자청비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흐를까.

학생 때는 하루하루가 느리게 가는 것 같아, 어른이 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말이다.


숨을 죽인 채 둘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났다. 모두가 미쳐 있던 꿈, 자기 집 딸만 아니라면 처녀 하나 바쳐서 편안하게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집단적 이기심. 지배자들이 만들어놓은 그 교묘한 집단적 공포와 최면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이제야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이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본디 치수는 통치자들의 임무였다. 그것을 게을리한 자들이 ‘처녀’라는 ‘희생양’을 택해 자신들의 책임을 희생양에게 전가한 것이다. 본래 처녀와 함께 ‘외부자’에 속해 있던 마을 사람들은 처녀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통치자들과 같은 ‘내부자’로 포섭된다. 홀로 외부자로 남겨진 하백의 신부만이 물가에서 떨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거대학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서문표가 행하는 더 강력한 폭력 앞에서 무너진다. 이것이 바로 ‘희생양과 폭력’의 논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하백이 신부를 맞이하다(河伯娶婦)’라는 유명한 이야기의 본질이다. (p168~170)


이 이야기는 영화, 드라마, 웹소설, 웹툰 속에서 자주 변주된다.

처음 접한 중국 신화 속 하백 이야기를 읽으며, 정작 하백이 가장 큰 피해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름만 등장할 뿐이었다.


이 장면이 유독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는데, 왜 이렇게 익숙할까 생각해 보니, 최근에 본 웹툰 〈전지적 독자 시점〉 속 설정과 너무 닮아 있었다.

웹소설로 시작해 웹툰과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싱숑 작가의 대표작.


최근 바쁘게 일하면서 오디오북으로 듣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빠져버린 소설이다.

전. 독. 시 초반부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등장하자, 더 강력한 폭력에 의해 통치자들이 몰살당하고, 집단적 이기심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깨어나는 장면이 있다.


“지배자들이 만들어놓은 그 교묘한 집단적 공포와 최면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이제야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이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


이 문장에서 나는 크게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이유는 ‘불안’ 같아서이다.

나는 불안도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다. 어쩌면 내 기질도 불안이 높은 기질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불안을 결국 아이에게 유전으로 물려주었다.

아이 앞에서 불안을 숨기면 괜찮을 거라 생각해 불안해도 티 내지 않으려 엄청 노력했었다.

하지만 아이는 기질적으로 높은 불안을 안고 태어났다.

한 번 불안이라는 지배자가 나를 덮치면, 이성을 잃고 불안에 벌벌 떨며 이성을 다시 되찾는 데에 최소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현재는 예전보다 많이 안정되었지만, 불안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아이는 속눈썹을 뽑아 불안을 해소했다.

나는 그저 손톱을 물어뜯거나 머리카락을 만지는 습관처럼 잠깐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간이 길어지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상담을 받았다.


그러다 알았다. “상처가 더 커지는데, 왜 약 안 발랐어~” 같은 별 일 아닌 말 한마디에도

아이는 핸드폰을 켜고 상처가 어떻게 될지 검색하며 불안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었다.

유심히 보니, 그 모습이 불안에 사로잡혔던 나와 똑같았다.


아이는 그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불안했구나. 많이 불안하구나. 엄마가 있으니까 걱정 마. 엄마가 책임질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어쩌면 이 말은 내 안의 어린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위에 하백의 신부이야기에 나왔듯이, 물이란 단어를 보고 옛일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나를 자주 목욕탕에 데리고 가셨다. 어릴 때 안짱다리였던 내 다리를 펴주려고 매일 목욕탕에 데려가 다리를 주물러 펴주셨다.

엄마는 나중에 커서 교정해 주면 된다고 할머니 힘드시니 내버려두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여자아이가 예쁜 다리를 가져야 한다며 매일을 노력하셨다.

덕분에 교정 없이도 잘 걷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와서야 그 노고를 헤아리게 되었지만 감사하다고 말해도 들을 수 있는 할머니가 안 계셔서 씁쓸할 뿐이다.


지금의 나에게 물은 두려움의 대상이자 찝찝함의 대명사다.

겁이 많아 물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특히 여자들끼리 몸을 드러내야 하는 공간이 불편하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들을 위해 물과 함께하려 한다.

무섭고 싫고, 불편하고, 콤플렉스가 있고, 부끄럽더라도 엄마로서 기꺼이 물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