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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러너 May 18. 2024

당근으로 전세? (2) 남자들의 수다

(2) 집을 대체 어떻게 쓰길래 안 나가는지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2월 중순, 전셋집에 방문해서 집상태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다고 세입자분께 연락했다. 아내 본인이 직접 와서 보기 어려우니 꼼꼼하게 현재 집 상황을 사진과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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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휴가를 내고 전셋집을 방문하니, 평일이라 아이들은 집에 없고 세입자 본인만 재택근무 중이었다. 본인들이 사는 모습을 찍어가는 것이 기분이 나쁠 것 같아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도저히 집 상태를 찍어가겠다는 말이 입에서 안 떨어져서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을 갖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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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4년째 계속해서 달리기에 빠져있다는 이야기와 100km 울트라마라톤에 도전했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관계의 문제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어떻게 보면 약점이고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자 그가 많이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살짝 감정이 올라와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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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더 이상 그와 나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저 세상을 조금 더 살아온 중년 남자와 조금 더 젊은 남자의 진솔한 대화였다. 전셋집에서의 '남자들의 수다'는 그렇게 4시간이나 이어졌다. 처음에 굳은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시작된 오늘의 만남이 이렇게 전개될 줄을 그도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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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진심을 다하는 것이 나의 장점이자 최선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꺼내놓자 그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공황장애로 힘들었던 이야기였다. 사실 그는 헬스로 몸이 다져진 몸짱이었다. 처음 전세 계약을 위해 그를 만났을 때 한 눈에도 조각 같은 몸매와 훤칠한 남자다운 모습이 멋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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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그가 오늘 만나서 자세히 보니 보통 중년남자의 몸매로 변해있었다. 어느 날 이유 없이 찾아온 공황장애로 회사를 다니기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운동을 하면 가빠지는 호흡이 마치 공황장애 증상과 비슷해서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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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이제는 좀 어떠신가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젠 다 나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갑자기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참, 왜 다른 곳으로 이사 가려고 하시는지요? 저는 선생님이 앞으로도 계속 계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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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진다. "사실 제가 신혼부부로 여기 들어와서 아이들 둘을 낳았잖아요. 2살, 3살이라 아이들이 어리고 남자아이도 있거든요. 아이들이 생기고 쿵쿵대며 뛰어다녀서 밑의 집에서 자꾸 전화가 오고 올라오셔서 힘드네요. 이제 무조건 1층으로 가려고 해요. 노이로제가 걸린 것처럼 제가 아이들만 보면 뛰지 말라고 소리부터 지르고 화만 내고 있어서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만기 때 이사 가겠다고 문자 드렸던 거예요. 저도 이 집 너무 깨끗하고 살기 좋아서 계속 있고 싶은데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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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상황과 마음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소음방지 매트를 더 깔아보는 것은 어떨지 물어보고, 필요하면 저도 같이 보태겠다고 했지만, 아파트 구조적인 문제라 매트로는 커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가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고 화를 내다가 부모로서 잘하고 있는 건지 속상해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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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도 화장실 청소를 할 때 딸들이 미울 때가 많았어요. 씻고 나면 바닥에 머리카락은 왜 그렇게 많이 떨어지는지. 매번 신경질을 내다가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에 여기 긴 머리카락이 없는 것이 정말 좋은 일일까? 만일 머리카락이 없다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 어떤 이유로든 지금 내 곁에 아이들이 없다면, 화장실에 긴 머리카락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는 큰 병에 걸려서 탈모가 되는 경우에도 화장실에 긴 머리카락이 없을 거니까요.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요. 화장실이 더럽다는 건 어쩌면 아이들이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긴 머리카락은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사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알리는 행운의 증거가 아닐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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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입자 분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가 애써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오늘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 화장실 긴 머리카락에 감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지금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기 전에, 아이들이 뭔가를 어지럽혀서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오늘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를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내볼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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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나도 울컥했. 사실 오늘 내가 전셋집에 온목적은 사실 집안의 동태를 살피고 대체 어떻게 집을 쓰고 있어서 이렇게 오래 집이 안 나가는지 조사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본분을 완전히 잊고, 가장 노릇에 지친 두 남자의 힐링 토크로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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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신을 차리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께서 현재 전셋집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오신 건데, 이대로 그냥 가시면 사모님께 크게 혼나시는 거 아니에요? 저희는 상관없으니 집 곳곳 사진 마음껏 찍으시고 동영상으로도 구석구석 다 찍으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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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웃으며 말했다.

"괜히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집에 정확히 보고를 해야 해서 열심히 찍어 가겠습니다."

집안을 꼼꼼히 찍을 수 있도록 그가 도와주고, 보호매트를 들춰서 바닥 강화마루가 이상 없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동영상을 찍을 때는 본인이 나오면 불편할까 봐 방안에 들어가서 자리를 피해 준다. 미션을 모두 마친 후 그와 힘차게 악수를 하고 전셋집을 나섰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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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전셋집을 찍은 수십 장의 사진과 동영상을 와이프에게 보냈다. 물론 그 사진을 찍기 전에 4시간 동안이나 울고 웃던 '남자들의 수다'가 있었다는 것은 그와 나, 둘 아는 비밀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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