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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칭푸르 Mar 19. 2020

중화반점

국력을 과시하는 데 쓰였던 중국의 서커스!

누구라도 한 번쯤은 TV나 기타 매체를 통해서 접해보았을 중국의 서커스! 

세계 최고 수준의 현란한 쇼를 관람하기 위해 매년 많은 관광객이 중국을 찾고 있다. 

중국 역사에서는 한때 국력을 자랑하는 외교 수단으로까지 쓰였다는 이 어마무시한 쇼는, 오늘날 전 세계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최고의 유희로 자리 잡았다.


중국 현지에서는 서커스를 ‘잡다하다’ 또는 ‘가지각색이다’는 의미의 ‘짜(杂 : 잡)’에, 기술·기예 등을 의미하는 ‘지(技 : 기)’를 더해 ‘짜지(杂技 : 서커스)’라고 한다. 이는 서커스 자체가 워낙 변화가 많고 다양한 일상생활에서 기원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잡기’, 곧 ‘각양각색의 기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심지어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초보적인 발전을 이뤘다는) 중국 서커스의 역사는, 기원전 770년인 춘추전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중국에는 무수한 제후국이 출현했는데, 각 제후국은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먼크어(门客 : 문객)라던 당시의 인재는 각각 다양한 종류의 기예와 무술로 그 주인을 보조했으며, 이 중에는 곡예와 같은 특수한 기술이 있거나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力士)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이 문객이 중국 서커스 형식에 기술적인 기초를 제공한 주인공이다. 

한나라(기원전 206년 ~ 서기 220년)는 중국 서커스가 형성되고 성장한 시기로, 동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각종 서커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표현 예술을 집성한 빠이시(百戏 : 백희)가 탄생하기도 했다. (한나라 때는 서커스의 공연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틀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안에는 후세의 서커스에서 공연되는 내용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서커스를 좋아하기로 유명했던 한나라의 무제는 단지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외교적인 수단으로도 이를 이용했는데, 여러 나라의 사신을 초청해 성대한 연회를 열 때면 반드시 프로그램 안에 대규모 서커스 공연을 포함시켰다. 사신들은 서커스를 관람하며 그 신기함에 깊이 탄복했으며, 이는 그들로 하여금 한나라 제국의 부강함을 재차 확인하고, 그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나라(618~907년)는 가무(歌舞)가 함께하는 서커스가 번성하던 시기로, 민간 서커스와 궁정 서커스가 동시에 발전했으며, 미모가 출중한 여자 서커스인이 많이 출현하기도 했다. 

이후 송나라 때는 시장, 거리 공연으로 서민 서커스가 번영하였으며, 원나라 때는 중국 각 민족의 활발한 예술 교류 속에 짜쥐(杂剧 : 잡극-서커스와 극을 접목한 장르)가 흥성했다. 

그 후 중국 서커스는 (궁정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궁정 서커스가 심하게 쇠퇴한 명나라를 거쳐, 경극이 탄생한 청나라 때부터는 경극에 흡수되어 여러 표현에 응용되었다.

 


1949년 이후부터 중국 정부는 서커스를 정비하기 위해 상해·천진·북경·무한 등지에서 우수한 서커스공연(기술)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1953년 마침내 쭝구워 짜지투안(中国杂技团 : 중국 서커스단)을 창설한다. 

중국 서커스단은 창설 이후 구소련·폴란드·헝가리·네덜란드·덴마크 등 14개 국가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00여 국가에서 공연하여 중국 서커스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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