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회의 통역하러 갔다가 커피 심부름 했다

by 통역하는 캡틴J

이 글의 제목은 어쩌면 통역사로 입사한 내가 수행했던 통역이 아닌 일을 함축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겪었던 다양한 회사 중에는 정규직도 있고 계약직도 있었으며, 업계도 모두 달랐다. 또 통역사로서의 역할이 명확했던 곳도 있었고, 비교적 덜 그랬던 곳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통역 이외의 업무를 했던 곳과 안 했던 곳, 그리고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1. 바이오제약 기업 A


통번역 이외의 업무: O


이곳에서 나는 임원 담당 통역사로 입사했지만, 실제로 절대적인 통역 업무가 다른 회사에 비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통역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퇴근 후나 주말에 따로 통역 스터디나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고위 임원을 지원하는 포지션이다 보니 의전 업무가 많았다. 그의 짐을 내 캐리어에 챙기는 것, 출장 일정을 툭치면 대답할 수 있도록 외워두기, 다른 동료와 함께 해외 파트너사를 위한 기념품 조사 및 챙기기, 보고서 작성, 자료 조사 및 자료 정리, 회의실 세팅 업무, 이메일 작성, 일정 조율 같은 업무의 비중이 통역과 비등한 수준이었다.


나는 사실 근데 이런 "다른" 업무가 싫지 않았다. 통역 외의 일이 괜찮은 사람과 괜찮지 않은 사람을 기준으로 나를 분류해 본다면 나는 전자에 속하는 것 같다. 통역 일로 입사하긴 했지만 점차 다른 일이 주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또 미래의 내가 이 회사에서 인정받게 될 가치의 측면에서도 업무 영역을 넓혀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런 업무를 대하는 나의 속마음은 쾌활했다.


1) 장점:

- 임원과 동행하며 해외 협력사와의 협력 과정, 대외 활동 등의 상황을 가까이서 배울 수 있었다.

- 단순 통역을 넘어 업계 전반 또는 큰 그림을 이해하는 기회가 됐다.


2) 단점:

- 통역 업무 비중이 적어서 약간은 아쉬움이 있었다.

- 다른 일을 했다기에는 또 그리 본격적이지는 않아서 향후 내 입지에 대한 가시성이 뚜렷하지는 않았다.



2. 바이오 생산시설을 운영하는 기업 B


통역 이외의 업무:


이곳은 생산 공장이었다. 단계별 작업복을 갖춰 입고 정해진 SOP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나는 현장에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게스트를 위한 투어에 동행했었다. 평소에는 현지에 상주하는 해외 업체와 회사 직원 간의 통역을 주로 해왔다.


이 회사를 라고 표시한 이유는 중간에 회사 상황이 안 좋아지며 나의 역할을 상실했을 때, 현장 업무 투입 및 잡무를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통역 이외 업무를 하는 것에 늘 열려있던 나였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던 회사에서 잡무를 요구받았을 때의 내 마음은 참담했다. 왜냐하면 이 요구를 수락하지 않았을 경우 그 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업무는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1) 장점:

- 현장 업무를 직접 가까이서 보는 것이 흔치 않은 기회였는데 이를 경험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 단순 통역을 넘어 생산 및 품질 관리 관련 용어와 절차를 익힐 수 있었다.

- 중소기업 재직 혜택(교통비 지급이나 연말정산 등)이 꽤나 크게 체감되었다.

- 보통은 임원을 지원하는 포지션이 많은데 이곳은 실무진 통역 담당이어서 통역할 때 마음이 다소 편안했다.


2) 단점:

- 중소기업의 무질서와 체계의 부재를 느꼈다.

- 이곳에서 다른 업무를 하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조차 나의 성장 가능성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3. 글로벌 제조업 기업 B


통번역 이외의 업무: X


이곳에서는 오직 통번역 업무만 담당했다. 임원을 지원하며 그 임원이 참석하는 회의 통역, 외부 행사 동행, 기술 문서 번역 등으로 이루어졌다.


1) 장점:

- 통역사로서의 역할이 명확했다.

- 위스퍼링(가까이 붙어서 귓속말로 통역하는 것) 경험치를 쌓기 좋았다.

- 업계 전문 용어와 기술적 이해를 쌓을 수 있었다.


2) 단점:

- 통역 외의 업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기업 내 다양한 경험을 쌓기는 어려웠다.

- 업계 특성상 기술 용어가 많고 학습 부담이 컸다.



4. IT·유통 기업 D


통역 이외의 업무: X


이곳에서도 통역사로서의 역할이 확실했다. 지원하는 대상 실무자 집단이 명확하고 이들을 위한 통역 업무를 담당했으며, 그 외의 업무는 거의 없었다.


1) 장점:

- 통역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에 통역 실력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유연성과 적응력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파워 J였지만 이곳은 J력 따위 소용없기 때문에 나는 P의 자질을 기를 수 있었다)


2) 단점:

- 업무 강도가 높고 업계 특성상 빠른 속도로 처리해야 하는 회의가 많았다.

- 높은 업무 집중도를 요구하기에 퇴근하고 누워서 잠만 자는 나날이 늘어갔다. (참고로 통역은 상당히 에너지 집약적인 활동이다)




통역사로 일하면서 다양한 기업을 거치며 정말 통역만 기계처럼 하게 되는 곳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업무를 하게 된 곳도 있었다. 이 경험들을 통해 배운 점이 있다면, 기업마다 통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고, 내가 원하는 커리어 방향에 따라 회사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이 업계 경험을 중시할 것인지, 통역이라는 내 고유의 커리어를 중시할 건지에 따라 내 선택이 달려있다.


만약 통역사로서의 전문성을 키우고 싶다면 통역 업무가 확실한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고, 반대로 기업 내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고 싶다면 업무 범위가 넓은 곳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회의 통역하러 갔다가 커피 심부름 했다”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 언제 어디서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늘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keyword
이전 06화졸업보다 중퇴가 쉬운 곳, 통번역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