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가운을 벗고 마이크를 들다
간호장교 4년 차, 마취 간호장교는 2년 차였다.
군병원은 격변의 시기였다.
병원에 배치된 간호장교들을 사단 쪽으로 빼고 그 빈자리는 민간 간호사로 채우던 시기였다. 냉철하게 보자면 평균적으로 군병원은 몇 군데를 제외하고 민간 병원에 비해 환자의 중증도가 낮은 건 사실이었다. 그나마 병원에 배치되는 기회를 앗아간다면 대체 간호장교들은 어찌 다양한 케이스를 스터디하고 임상 지식을 쌓으라는 말인가? 책상에 앉아서만 지식을 쌓고 대학원 가서 배우라는 말인가?
밖에서 경험을 쌓은 민간 간호사의 경우 경험도 풍부하고 술기에도 능했다. 간호장교는 진급하며 계급이 올라감에 따라 행정 쪽으로 빠지고 그저 군병원이 잘 굴러가게끔 하는 역할만 하라고 하는 걸까?
임상에서 벗어나 행정 쪽으로 빠지는 건 내가 더더욱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새로운 미래 성장 동력을 찾아야 했다. 내가 고려해 본 몇 가지 옵션이 있었다.
1. 민간 간호사 -> 군 병원 경력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
2. 보건 교사 -> 교직 이수를 하지 않아 불가능
3. 보건 공무원 -> 외근 많음
4. 미국 간호사 -> RN 취득, 비자 발급, 취업까지 n년
5. 아예 다른 일 하기
전역을 결심하고 만 2년이 남은 시점에서 나는 5번에 계속 마음이 갔다.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내가 있던 병원은 한 의료봉사 단체와 결연을 맺었었는데, 직원들이 정기적으로 클리닉으로 봉사활동을 가서 무료로 진료를 본 환자들을 위해 약도 나눠주고 복약지도도 해주는 식이었다. 그 봉사 단체를 통해 우연히 통역사이자 간호사인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알아보니 국내 통번역대학원 출신인데 의사들의 논문도 번역해 주고 간호사도 하면서 연봉도 높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 이미 내 마음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중학교 때 2년 정도 가족을 따라 외국에 거주했다. 2년간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당시만 해도 외국에 나갔다 온 학생이 학급에서 그리 많지 않았고 덕분에 내 영어 성적만은 항상 상위권에 있을 수 있었다. 최소 하나에 대해 무한한 자신감이 있다는 것, 그것은 영어 관련한 어떤 것이라면 나를 꼭대기 어딘가로 데려다줄 동아줄로 인식하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통번역대학원의 존재를 알기 전부터 나는 이미 통번역에 연결고리가 있었다. 꽤나 규모가 컸던 그 군병원에서 구석진 수술실에 처박혀 있는 간호장교였지만 외국인이 방문할 때마다 통역 역할로 차출되었다. 또 가뭄에 콩 나듯 생기는 어느 외국인 환자를 위한 번역이 필요한 일이면 언제든 불려 갔다. 그 당시 내가 했던 통역과 번역, 지금 생각하면 쥐구멍에 숨고 싶은 엉터리 통번역 덕분에 내가 통번역을 업으로 삼으면 잘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더없이 상승하고야 말았다.
통번역대학원 그리고 동시통역사.
전문직처럼 보이면서 나를 군대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탈출구. 영어로 먹고살면서 있어 보이기도 한 사짜 직업. 영어로 잘 나가는 사람들만 모아 놓은 내가 진짜 있고 싶은 그곳.
아직도 기억나는 건 내가 처음 통번역대학원 간다고 했을 때 가족의 반응이었다.
"네가...?"
그도 이해가 가는 것이, 통번역대학원은 정말로 영어로 날고 기는, 외고 출신, 유학파(최소 5년 이상 거주),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 최소 영문학과 또는 관련 학과, 이미 업계에서 통번역 일을 하는 사람들이 도전장을 내미는 곳이었는데 나는 그중 어떠한 것도 갖추지 못한 허들의 출발선상에 있었다.
비전공자, 비유학파로서 반드시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공부기간은 2년을 잡았고 1년 단위 플랜을 세워 그걸 2년 동안 반복할 생각이었다. 내 통대 입시 공부 계획은 이랬다.
- 1개월~3개월: 토익과 토플로 다양한 지문을 읽고 쓰고 들으며 인풋 늘리기. 최소 1주일에 지문 몇 백개 이상.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동시에 하기. 단어 3만 개 이상 습득하며 기본기 쌓기.
- 3개월~5개월: 영자 신문 읽기 시작. 다독을 하면서 좋은 지문을 골라 deep dive. 영어 순해 책을 통해 문장 구조를 마스터하기. 이후 cnn/npr 등 해외 미디어 통해서 뉴스 들으며 하루 최소 10분짜리 섀도잉 10회씩 하며 통역을 위한 구강 근육 만들기.
- 5개월~6개월: 이때까지 했던 것들은 기본 베이스로 매일 수행하며 남는 시간에는 원서 읽기. 분야는 역사, 경제, 환경 등 시사에 도움 될 수 있는 책으로 선정(Naked Economics, A Little History of the World, Sapiens 등).
- 7개월~12개월: 본격적으로 통대 입시 준비반 다니기. 번역 시험 통역 시험 준비로 모의고사반에만 집중.
위 계획을 매월 실천하다가 준비 7개월 차에 드디어 통대 입시의 등용문이라는 통대 입시 학원에 들어갔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모의고사에 매달릴 요량으로 용감하게 바로 실전 모의고사 준비반에 등록했는데, 첫 수업 때 강사가 시켰던 나의 통역을 기억한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았는데 일단 뭐라고 영어로 내뱉은 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어온 원장의 크리틱은,
"문법도 틀리고 발음도 틀렸다. 죄송하지만 기본기를 쌓고 다시 와야 할 거 같고 올해는 합격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였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났는데 당시에 정말 힘들었던 이유가, 매일 8시~5시까지 근무하고 1시간 저녁을 먹고 밤 11시까지 공부하는 삶을 6개월 넘게 지속 중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중단할 이유도 없었다. 늘 그랬듯이 내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시공간의 제약상 외부의 도움은 최소화하고(주간에는 일을 하기도 해서 정말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최대한 내 스스로 준비해 보기로 했다.
통대 1차 시험은 지문 요약이다. 영어 지문은 한국어로 요약, 한국어 지문은 영어로 요약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이 1차 시험 준비반은 월수금에 열렸다. 나는 일단 1개월 다녀보고 그 뒤로는 혼자 해볼 생각이었다. 공부든 운동이든 업무든 초기에 집중해서 배우고 독립하기는 내 주특기였다.
그렇게 어렵게 스케줄을 조정해서 주 2회 반차를 내고 월수금 수업에 월수/월금 등으로 최대한 참석하면서 어떻게 수업이 진행되는지 습득했다. 학원엔 좀 미안하지만 나는 매주 열심히 이면지 칸을 뒤져 거기서 모의시험 문제와 그 모범 답안이 인쇄된 이면지를 챙겨갔다. 다람쥐가 도토리 쟁이듯 나 혼자 나중에 연습하기 위한 지문들이었다.
통대 2차는 당연히 통역 시험이다. 1차 시험의 말하기 버전이다. 영어로 지문이 나오면 한국어로 요약 통역하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통역은 그 자리에서 바로 대학원 교수진이 평가한다. 살 떨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보통은 2차 시험 준비 할 때 타인과 스터디를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하면서 매일 수험 기간을 보내지만 나는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도 없고 장소의 제약도 있었기에 이 무렵 나는 이 스터디를 비非입시생과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지문 읽어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기에 내 친한 친구에게 매번 녹음이나 라이브 낭독을 부탁했다. 내 통역은 녹음해서 나중에 자체적으로 평가했다. 입시에 뭐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다양한 지문이 많이 필요했고 2차 시험도 물론 이면지의 도움을 받았다(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이면지 코너는 사라져 있었다).
이렇게 남은 6개월을 모의고사 형태로 준비했고, 시간이 흘러 1차 시험에 통과하고 2차 시험 당일이 다가왔다. 이미 2차 시험에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고 1차를 붙은 것만으로도 크게 감사하던 중이었다. 어차피 2년을 잡았기에 낙방하면 한 번 더 이 과정을 반복할 생각이었다. 2차 시험 2주 전부터 친한 의사 선생님까지 동원해 통역 시험과 동일하게 책상을 배치해 면접을 준비했던 나였다.
차분한 마음으로 시험장에 들어갔다. 암 유발의 원인에 대한 영한 지문이 흘러나왔다. 나는 암병동 간호사도 아니었는데 그 지문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고 너무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잘했던 거 같다.
한영 지문은 환경과 쓰레기에 대한 지문이었다. 너무 슬프게도 소각(incineration)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burn the waste로 돌려 말했는데 한 교수님이 소각이 영어로 뭐냐고 물어보셨지만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어를 몰랐음에도 그것을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로 돌려서 말했던 것이 +1점이었던 거 같다.
2차 시험 합격 결과를 택시에서 확인하고 기사님 뒤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앞으로 다가올 더 험난한 여정은 알지 못한 채, 매일 학교 이름을 눈에 그리며 살아온 지난 1년을 뒤로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2019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