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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보다 중퇴가 쉬운 곳, 통번역대학원

by 통역하는 캡틴J

하루하루 울면서 지냈던 지난 "통대" 생활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졸업보다 중퇴가 쉽다"라고 할 수 있겠다. 들어오기 전에는 간절히 오고자 하지만 들어오게 되면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흥미로운 이곳, 그 영역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2년간의 통번역대학원에서의 삶을 카테고리 별로 나누어, 정보 제공을 가장한 회고로 설명해보려고 한다. (참고로, 세부 내용은 대학원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 커리큘럼


통대에서는 영어 실력이 완성된 학생들을 뽑아 그들을 진정한 통역인으로 키운다. 그런데 여기서 "영어 실력이 완성"되었다는 것이, 곧바로 통역을 배워도 무리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입학 초기에는 통역을 배우기에 적합한 과목을 먼저 수학한다. 한국어나 영어 자체를 심층적으로 배운다던지, 입문 과목을 통해 통번역 이론을 배우기도 한다. 교양 과목으로 매주 주제를 달리해 특강을 듣기도 하는데, 당시 졸업반 선배들이 이 특강을 동시통역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움+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학기가 지나며 본격적으로 순차통역을 배운다. 순차는 말 그대로 순서대로 통역하는 것이다. 연사의 발언이 끝나면 통역이 시작된다. 연사의 발언 단위는 1분이 될 수도, 또는 2-3 문장이 될 수도 있지만 통대에서는 4분 내외를 한 단위로 해서 통역 연습을 한다. 솔직히 처음에 순차통역 분량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어쩌면 동시통역을 처음 접했을 때보다 컸던 거 같다. 4분 동안 발언되는 말의 분량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이를 다 외워서 하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하므로 여기서 "노트테이킹"을 배우게 된다.


노트테이킹은 기호 등을 사용해서 연사의 발언을 기억할 힌트를 남기는 것이다. 초반에 모든 발언 내용을 완벽하게 기억하려고 죄다 기호로 바꿔서 기록하다가 나중에 통역 시작하려고 할 때 기억나지 않는 기호만 가득한 나의 노트를 보며 말문이 턱 막힌 적이 있었다.

노트테이킹은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중요한 건 나의 기록을 어떻게 하나의 로직으로 엮어나가는 것이리라. 그때 당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읽었던 아래 책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출처: 교보문고


통대의 커리큘럼은 물론 순차통역과 동시통역으로 대표되긴 하지만 이것이 다라고 설명되기에는 세부 과목이 다수 존재한다. 우선 이 두 과목은 초급과 고급으로 나뉘고 다시 이것이 한->영, 영->한 양방향으로 나뉜다(예: 한영 동시 심화). 각 과목에서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수업이 진행되는데, 경제, 사회, 환경, 과학기술, 의학, 문화, 외교 등 어쩌면 통역이 필요한 최소한의 분야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선정되어 있다. 그리고 메인은 아니지만 동 분야의 번역 과목도 이수한다. 번역의 경우 통역과 달리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일부 영역을 선택하기도 한다(예: 한영 번역 경제 등).


순차통역조차도 늘 허덕이던 나였지만 그나마 순차통역은 내가 연사의 발언을 정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에 감사하던 때가 동시통역에 입문하던 시기였다. 동시통역 같은 걸 어떻게 하냐!라고 매일 마음속으로 외치던 때 나는 시역(눈으로 문장을 읽어나가며 언어를 전환하기)에 몰두해 있었다. 처음에는 한 문장, 그다음은 두 세 문장씩 시역 하며 ABC 문장을 ABC 순서 그대로 따라가며 마음속으로 통역해 보기를 반복했던 나날이었다.


[시역 연습 예시]

Technological advancements such as artificial intelligence and digitalization are reshaping industries and business models.
번역: 인공지능과 디지털화 같은 기술 혁신이 산업과 비즈니스 모델을 재편하고 있습니다.

시역: 기술 발전, 즉 인공 지능과 디지털화 같은 혁신이 산업과 비즈니스 모델을 재편하고 있습니다.


At the same time, we face unprecedented challenges such as climate change, economic inequality, and supply chain disruptions.
번역: 동시에 우리는 기후 변화, 경제적 불평등, 공급망 불안정과 같은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시역: 동시에 우리는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기후변화, 경제 불평등, 공급망 교란 등이 산적해 있는 상황입니다.


To navigate these uncertainties, we must work together to find sustainable and inclusive solutions.
번역: 이러한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야 합니다.

시역: 이런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협력을 통해 지속가능하고 포용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2. 하루 일과


나는 아침형 인간이라 항상 오전 수업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전 8시 전부터 일과가 시작되었다. 아침 수업을 듣고 공강 시간에는 과제를 하거나 스터디를 했다. 그렇게 오후 5시까지 일과가 끝나면 운동에 갔다가 과외 준비와 스터디를 했다.


과외를 했던 건 내 용돈은 내가 벌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숨고를 통해 첫 과외를 구할 때 영어 과외 단가가 생각보다 낮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는 전문 과외 선생은 아니었으니 수업 준비 시간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도 나의 공부에 도움 되는 과목으로 선택하느라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매일 하루를 꽉 차게 보내면 금요일쯤에는 거의 모든 것이 소진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정말 중요한 약속 한 가지를 했다. 바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 중 하루는 책상에 가지 않고 신나게 놀기였다. 그래서 정말 나는 대학원 생활 2년 동안 매주 토요일은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밖에 나가서 놀았다.




3. 학교 생활(feat. 코로나19)


나는 참으로 군대스러운 대학교를 나왔던 터라, 대학원에 가기 전부터 캠퍼스 라이프에 대한 엄청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따스한 어느 좋은 날에 캠퍼스를 누비며 한 팔에는 책을 끼워 들고 다른 한 팔에는 큰 쇼퍼백을 매고 있을 나의 상상 속 모습은 그야말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코로나였다.


코로나19는 전국의 대학생/대학원생에게, 같은 돈 내고 줌 수업이라는 신박한 교육 방식을 선사해 주었지만 돌이켜보면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통학 시간을 상당히 줄여주었고, 훗날 줌 동시통역이 보편화된 새로운 세상에도 발 빠르게 적응할 수 있던 역량을 만들어 주었다.


다행히 코로나가 수그러들 때쯤, 즉 막 학기에 나는 드디어 학교에 나갈 수 있었다. 혹자가 말하길, 어떤 기수는 매일 얼굴을 마주치며 여느 직장 생활처럼 서로 크고 작은 충돌이나 다툼에도 휘말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 우리 기수는 다들 그동안 온라인 친구여서 그랬는지, 학교에서 드디어 얼굴을 맞대고 수업했을 때도 큰 트러블 없이 대부분 순한 양처럼 평화롭게 학교에서 지냈던 것 같다.




4. 스터디


통대 입시도 그렇고 통대 생활 그 자체도 스터디가 8할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테마다. 초반에는 나도 스터디를 하루에 2-3회 하다가 졸업 시즌에 다가갈수록 하루 5회까지 늘렸다. 각자 수업 스케줄이 다 다르다 보니 스터디 구할 때 약간의 어려움이 있지만 운 좋게 좋은 스터디 파트너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스터디 자료는 주로 정부 부처나 싱크탱크에 올라오는 연설문이 중심이고 대통령 연설은 특히 그중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필수 주제이다. 스터디 자료를 준비할 때는 매주 두세 개의 지문을 찾아놓고 워드 문서 상단에 글로서리를 정리한다. 그 아래에는 해당 연설문을 붙여 넣는다. 내가 준비한 지문은 반드시 나도 먼저 통역 연습을 해보고 특별히 어려웠던 문장은 따로 정리해 두어 파트너에게 공유한다.


매주 수십 번의 스터디를 하면서 당연히 상대방 또는 내가 시간이 어긋나 스터디를 스킵할 때도 있는데 여러 굴곡에도 내가 절대 고수했던 것은 "스터디를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복습을 안 하는 경우는 없게"하는 것이었다. 통역은 어쩌면 한번 내뱉고 끝나는 일회성의 활동이 아니라, 자다가도 갑자기 이불킥을 하게 되는, 그래서 했던 문장을 곱씹으며 다듬어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기에 2년의 대학원 생활동안 내가 공부했던 모든 지문은 반드시 복습을 했다. 초반에는 거의 모든 문장을 제대로 못했기에 전부다 다시 시역을 했다면, 졸업에 가까이 가서는 그 비율이 점점 줄어들 수 있었다.

복습 기록




5. 졸업시험


통대가 졸업이 어렵다는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졸업시험 때문이리라. 총 여섯 과목을 보게 되는데, 영한 동시, 영한 순차, 한영 동시, 한영 순차, 영한 번역, 한영 번역이다. 간호사 국가고시를 준비하던 짬밥(?)이 무색하게 다시금 출발선상에 서있다고 생각되었던 무서운 졸업시험.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어느 수업 때 들은 바에 따르면 원래 이 졸업시험 여섯 과목을 한 번에 통과한 사람들만의 리그가 존재한다고 했다. 초기에는 한 번에 모든 과목을 통과해서 국제회의 통역 전공을 획득하는 게 중요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여섯 과목 중 일부 과목을 통과하지 못해도 매 학기 재시험을 볼 수 있도록 바뀌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또한 졸업시험이 끝나고 모든 과목을 한 번에 통과한 사람들은 은연중에 이름이 따로 거론되기도 했다.


나는 기수에서 이름 날리던 학생도 아니었고, 스스로 통역사 흙수저를 자처하며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에 급급해서 일단 한 번에 통과는 고사하고 몇 과목 만이라도 붙기를 희망하던 터였다. 교수님의 간택도 받지 못하고 통역도 그리 잘하지 못하던 변두리 어디 구석에 존재하는 일개 (예비) 통역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갔다. 우선 그동안 배웠던 다양한 분야별 대표 지문을 모아 나만의 졸업시험 파일철을 만들었다. 수능 오답 노트 만들듯이 내가 복습했던 지문들로 구성된 이 노트라도 있어야 시험 당일에 안심이라도 될 거 같았다.


돌아보면 내가 졸업시험 당일 보였던 것들은, 이런 안심시키기용 오답노트를 줄줄 외던 내 모습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매일 울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매일매일의 훈련 결과에 따른 내 실력을 펼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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