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일본 나고야에서 온 아이코야.”
“아, 안녕. 나는 한국 서울에서 온 정세경이야.”
스물일곱 해를 살면서 룸메이트란 존재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룸메이트라고 하면 어디 청춘 드라마에나 나오는 캐릭터인 줄 알았지 중국에서 일본인 친구를 룸메이트로 만날 날이 올 줄이야. 뭔가 신기하면서도 어색하면서도 무지 반가웠다. 그토록 그 친구가 반가웠던 건 이틀을 굶은 끝에 함께 밥 먹으러 갈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사흘 전 먼저 기숙사에 도착했던 나는 현지인들의 지나치게 빠른 중국어에 기가 팍 죽어 기숙사 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게 겁이 나서였다. 하지만 겁나는 건 겁나는 거고, 배가 고파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되자 어디선가 빵과 음료를 사러 갈 용기가 솟아났다. 그러나 겨우 그깟 빵과 음료로 한창 때의 허기를 메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짜잔 나타난 룸메이트라니, 그게 누구였다 해도 눈물 나게 반가울 수밖에. 그 친구가 중국어를 얼마나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늘에서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온 것 마냥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아쉽다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본 결과, 내 룸메이트는 ‘도긴개긴’이 무슨 뜻인지 몸소 알려 주는 중국어 실력의 소유자였다. 우리 둘이 백지장을 맞들면 그대로 부욱 찢어질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아무 상관없었다. 속된 말로 혼자 쪽팔리는 거보다 둘이 쪽팔리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기 우리… 잠깐. 사전 좀.”
“으응? 그, 그래.”
우리 두 사람의 중국어 실력이 얼마나 하찮았는가 하면 처음에는 정말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중국어 사전을 찾아서 서로의 눈앞에 대령해 줘야 할 정도였다. 지금처럼 번역기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끽해야 전자 사전이 최신 기기였던 시절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내게는 그 전자 사전조차 없었다.
“밥, 저기, 식당, 오케이?”
“아, 오케이, 오케이.”
“갈까, 지금?”
“아니, 저, 12시.”
밥 한 번 먹으러 가겠다고 한 문장은커녕 단어 몇 개로 더듬거리며 영어 같지도 않은 영어를 섞어서 대화를 하노라면 요즘말로 현타가 세게 오곤 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나와 아이코의 냉혹한 현실인 걸. 그런데 웃기는 게 그렇게라도 계속 중국어로만 대화를 하고 또 하다 보니 한두 달쯤 뒤에는 사전 없이도 짧은 대화가 가능해졌다.
당시 굳은 마음을 먹었던 나는 첫 학기에는 학교에 있는 한국 학생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대신 내 주위의 친구들은 모두 외국 학생들이었다. 일본, 홍콩, 독일, 콜롬비아, 베트남, 타이완, 가나, 이탈리아 등등 국적도 가지각색이었다. 물론 중국 선생님의 수업도 있었지만 친한 친구들을 죄다 외국 아이들로 도배하고 나니 정말 중국어로만 말해야 하는 최적의 환경이 구축됐다.
그때도 느꼈지만 습관처럼 듣고, 말하고, 쓰는 것만큼 외국어를 배우기 좋은 방법은 없다. 더구나 친구들은 서로의 감정과 생활을 공유하니 더 다양한 주제로 별별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능했다. 이렇게 익힌 중국어는 쉽게 잊히지도 않았다.
어쨌든 I 중에서도 독보적인 I인 내가 가장 많은 친구를 사귀었던 때가 바로 어학연수를 했던 그 일 년이었다. 그런데 얕든 깊든 그렇게 넓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옆에 룸메이트가 있어서였다.
“우리 저기 있는 애한테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해 볼까?”
“그럴까? 근데 누가 물어봐?”
“그, 글쎄?”
“그냥 같이 가서 물어보면 어때?”
“아, 그러면 되겠다.”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어느 영화의 카피처럼 정말 우리 둘은 함께 있을 때면 못 할 게 없었다. 용기가 백배한 건 아니지만 혼자일 때보다 확실히 덜 창피했으니까. ‘함께’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어학연수 기간 내내 몇 번이고 실감했다.
“나 겨울 방학에 여행 가고 싶은데.”
“어, 나도.”
“넌 어디로 가고 싶은데? 나는 항저우랑, 쑤저우, 꾸이린…….”
“아, 나도 거기 가고 싶었는데. 우리 같이 갈까?”
“그럴까? 그럼 같이 계획도 짜고, 기차표도 예매하면 되겠다.”
혼자라면 쉽사리 실행하기 힘들었을 열흘이 넘는 여행도 마음이 맞는 룸메이트가 있으니 망설임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물론 우리 관계가 늘 화사한 봄날이었던 건 아니다.
“나는 육화탑 보러 가고 싶은데.”
“탑은 많이 봤잖아. 나는 서호 근처에 있다는 카페에 가고 싶은데.”
“여긴 역사 유적지가 많은 곳인데. 그걸 더 많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난 그래도 예쁜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싶은걸. 그리고 여기 여행 책자에 이 카페에 꼭 가 보라고 되어 있어.”
“뭐? 여행 책자에 어느 카페에 가서 차 마시라는 것도 나와?”
서로의 취향이나 문화적 차이로 충돌할 때면 차라리 내 마음대로 혼자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이에는 굳이 말로 한 적 없는 경쟁심도 존재했다.
“너는 대체 몇 시에 잠을 자?”
“12시나 12시 30분쯤?”
항상 11시나 11시 30분쯤 자던 아이코는 그 시간에 늘 깨어있는 내가 언제 자는지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평소 침대에 누워 공부를 하던 아이코가 바로 그날 밤부터 내가 하는 것처럼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11시 30분이 넘어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계속 공부를 한다고 버텼다.
‘쟤 뭐지? 원래 자던 시간인데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나는 늘 자던 대로 12시 30분쯤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딱 10분 뒤, 아이코도 부스럭거리며 침대에 눕는 소리가 들려 왔다. 본래 잠자리에 들면 한 시간은 있어야 잠이 드는 편이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우연인가 싶었지만 아이코는 무려 사흘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딱히 공부할 게 없어 보이는데도 단 1분이라도 나보다 늦게 자려고 애쓰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제야 눈치를 챘다.
‘아, 이 친구가 나한테 경쟁심을 느끼는구나.’ 그때는 룸메이트 사이에 별 이상한 경쟁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 뒤, 늦게 자는 게 힘에 부쳤던 아이코가 도로 자던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걸 보게 됐다. 그 순간, 은근히 안도하는 나를 보며 실은 나도 그 애에게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게 아닌 척하면서도 경쟁할 수 있는 아이코가 있었기에 중국에 있던 동안 나는 지치지 않고 꾸준히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두 학기, 정확히 말해 10개월을 함께 보내다 내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아이코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말했다.
“난 이제 기숙사에서 안 살고 밖에 나가서 자취할 거야.”
“왜?”“네가 없잖아. 기숙사 생활이 불편했지만 네가 있어서 한 거란 말이야.”
내가 이 친구에게 그 정도의 의미였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평소 잔정이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던 터라 누군가 날 이렇게 믿고 의지해 줬다는 게 고맙기도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어학연수 기간에 우연히 만나 인연이 된 룸메이트는 내게 창피한 일도, 즐거운 일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이자 중국어라는 같은 목표를 다투는 경쟁자였다. 어쩌면 친구의 다른 이름은 경쟁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 두 사람에게 그런 서로가 있어 줘서 참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