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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Oct 01. 2023

아뿔싸, 복권이 될 뻔했던 내 책

“나도 이제 출판 번역 기획서란 걸 한번 써 볼까?” 


새 출발을 다짐하고 비교적 이른 시간 안에 고양이 책의 번역을 맡았던 것은 어찌 보면 운이 좋아서였다. 마침 그때 출판사의 구직 공고를 보지 않았다면 새 출발이고 나발이고 섣불리 에이전시와 관계를 끊었다며 후회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운에 기대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른 일감을 얻기 위해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출판 번역 기획서란 번역가가 국내에 출간됐으면 하는 원서의 기본 정보와 내용 등을 소개한 글이다.

많은 번역가들이 손수 쓴 출판 기획서를 출판사에 보내 일감을 따낸다. 번역 에이전시에 있을 때는 딱히 기획서를 쓰지 않아도 됐다. 에이전시가 알아서 일감을 물어다 줬기 때문이다. 번역료가 낮은 데다 수수료를 나눠야 하고, 일할 기회가 자주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스스로 발품을 팔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직접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 야생으로 나온 이상 출판 번역 기획서를 써야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진짜 전업 번역가로서 첫발을 내딛기기 어려웠을 뿐, 일단 먹고살아야겠다고 생각하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나는 중국 베이징으로 첫 서점 투어를 떠났고, 번역하고 싶은 책들을 캐리어 한가득 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다시 그 책들 중에 내 취향이면서 한국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 네댓 권을 골라 출판 기획서를 썼다. 또한 그 책들을 낼 법한 출판사들을 찾아 출판 번역 기획서를 첨부한 메일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출판사의 선택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내 주신 출판 번역 기획서를 검토하였으나 저희 출판사의 출판 방향과 맞지 않아 책을 진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책 한 권당 적어도 열 곳의 출판사에 거의 난사를 하듯 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은 한결같았다. 그때는 대체 출판사가 말하는 출판 방향이란 게 뭔지가 참으로 궁금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출판 번역 기획서를 보낸 책들 중에서도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심리학 책이었는데 제목도 심플한 데다 콘셉트도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출판 번역 기획서를 처음 돌렸을 때도 사흘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세 곳의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을 정도였다. 출판사들의 답장이 보통 보름이나 한 달 정도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빠른 반응이었다. 


처음으로 긍정적인 연락을 받았던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사들은 작가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서, 책의 분량이 너무 많아서, 책의 전문성이 떨어져서 같은 이유를 대며 하나둘 손을 뗐다. 아예 연락이 안 왔으면 모를까 한꺼번에 관심을 보였던 출판사들이 끝내 모두 고사를 하니 허탈한 기분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거절에 거절을 맛본 나는 결국 포기 선언을 했다. 


‘책이 뭐 이것만 있나? 안 되면 다른 책이라도 해야지.’ 마음을 고쳐먹으니 어찌저찌 다른 책들의 번역할 일이 생겼다. 번역 에이전시와 일할 때보다 일감도 많아져 독립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버려뒀던 그 아이가 불쑥 떠올랐다. 


‘내용은 좀 중언부언이지만 책의 콘셉트는 참 좋은 것 같은데. 심리학 전공자들이 읽을 만한 책은 아니지만 심리학 입문용으로는 괜찮지 않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꼭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해 봤어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참에 기획서를 한 번 더 보내 볼까? 근데 2년 전에도 안 된 녀석인데 기획서를 다시 보낸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부정적인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왠지 그 아이가 눈에 밟혔다. 이왕 다시 도전하고 싶어졌으니, 바꿔야 할 것은 내 마인드였다. 그래, 얼굴에 철판 한번 깔아 봐? ‘어차피 출판사들이 받는 기획서가 한두 개가 아닌데 이걸 또 받는 걸 알기나 하겠어? 그때랑 다른 출판사에 보내면 되지. 거기다 이 책에 관심이 없다면 그 출판사 사람들이 나랑 얼굴 볼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소심한 마음을 다잡고 그 심리학 책의 출판 번역 기획서를 조금 손본 다음 다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한 출판사로부터 기다리던 답이 왔다! 


“정세경 선생님? XX 출판사예요. 혹시 이 심리학 책 다른 곳이랑 계약하셨나요? 저희가 출간하고 싶은데요.” 

“예? 이 책을요? 아…아직 계약한 곳은 없습니다.” 


나는 흥분으로 코 평수가 넓어질 것 같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무려 2년을 떠돌던 책이 드디어 주인을 만난 순간이다. 심지어 연락을 준 곳은 제법 이름이 알려진 대형 출판사였다. 전화를 받으며 쉽게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그때 내가 그토록 내적 환호를 했던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 책은 원문이 340페이지에 이르는 책으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분량이 무려 500페이지 정도로 늘어날 게 분명했다. 중국어는 뜻글자에,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 분량이 1.5배 정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의 번역을 맡을 내가 받게 될 번역료도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을 번역가가 어디 있을까. 심지어 당시 출판사는 내가 만족할 만큼의 번역료 단가를 제시했다. 거의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던 책으로 큰 번역료를 받게 되다니,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책이 나오고 1년 뒤, 나는 매절로 번역료 계약을 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됐다. 사실 두 달 정도 작업한 번역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길 때만 해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예상처럼 원고 분량은 엄청났는데 책에 반복되는 내용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중언부언하는 것은 중국 책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 심리학 책은 유난히 같은 말을 하고 또 해서 번역하는 내내 나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나 참, 앞에서 분명히 한 이야기인데 왜 여기서 단어만 몇 개 바꿔서 또 하는 거야? 어라, 뒤에도 또 나오네? 같은 내용이 자꾸 나온다고 번역가 마음대로 들어낼 수도 없고 일단 번역을 하긴 다 해야 하는데. 편집자가 보면 뭔 이런 너저분한 원고가 다 있냐고 하는 거 아냐? 미안해서 어떡하지? 이러다 이 책 망하는 거 아냐?’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하며 넘긴 번역 원고는 놀랍게도 편집자의 손끝에서 재창조됐다. 원고를 확인한 편집자가 중복되는 내용들을 과감히 삭제하고 필요한 내용들만 남겨 새롭게 원고를 정리한 것이다. 500페이지가 되었어야 할 책이 겨우 360페이지짜리 책으로 출간된 걸 보면 편집자가 노고가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유능한 편집자 덕에 무려 3분의 1에 이르는 내용을 정리한 다음 출간된 책은 꽤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그 심리학 책은 서점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심리학에 관심은 있지만 너무 어려운 책은 손대기를 망설였던 독자들이 심리학 입문용으로 그 책을 선택한 것이다. 콘셉트가 좋은 책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언감생심 베스트셀러까지는 바란 적이 없건만 뜻밖의 대박 작품이 탄생했다.


번역가인 나는 물론이고, 출판사도 초판이나 재판 정도가 팔리면 선방일 거라고 생각했던 책은 버린 자식에서 효도하는 자식으로 거듭났다. 2017년에 출간됐던 그 책은 지금도 절판되지 않고 꾸준히 팔리고 있다. 


그런데 책이 출간되고 3년 쯤 뒤, 우연히 그 출판사의 편집자와 만날 일이 있었다. 깔끔한 정리 신공을 선보였던 고마운 편집자는 오래 전에 출판사를 그만둔 뒤였다. 함께 식사를 하던 새 담당자가 말했다. 


“선생님, 이 책 번역하실 때 매절 계약하셨죠?”

“그랬죠.”

“아깝다. 인세 계약하셨으면 진짜 좋으셨을 텐데.” 

“그렇긴 한데, 출판사에서 저한테 인세 계약을 해 줬을까요?” 

“저희 출판사는 번역가 분들하고도 원하시면 인세 계약해요.”

 “아……, 정말요?” 


이런 된장, 티는 안 냈지만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매절이 아니라 인세 계약을 했다면 원래 받은 번역료의 3, 4배는 더 받았윽리라 생각하니 배가 살살 아플 지경이었다. ‘어이구, 누가 이렇게 잘 팔릴 줄 알았나?’복권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지만 ‘직접 골라서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쓴 책이 오랜 세월 떠돌다 결국 빛을 본 것만 해도 어디냐.’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돈도 돈이었지만 내가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쓰고 번역한 책 중에 가장 히트작이었던 그 책은 지금까지도 어머니와 나의 이야깃거리로 가끔 입에 오르곤 한다.  


“그 책이 그렇게 잘 팔릴 줄 알았으면 인세인지 뭔지 계약을 할 걸 그랬다, 얘.”

“결과를 알고 보니까 그런 거죠. 게다가 그 출판사에서 인세 계약해 줄 생각이 있는지도 몰랐잖아요.” 

“그래도 너무 아깝잖니.” 

“그렇긴 한데, 그래도 책이 잘 나가는 걸 보니까 포기하지 않기를 잘한 거 같아요.” 

“뭐가?” 

“만약에 그때 한참이나 묵혀 둔 이 책이 되겠어? 이러면서 포기했으면 베스트셀러고 뭐고 책 자체가 출간도 안 됐을 거 아니에요? 어쨌든 엄마 딸의 책을 보는 안목이 뒤늦게라도 인정을 받은 거니까 그거면 됐지, 뭐.” 

“그래, 네 말도 맞다. 그래도… 다음에는 잘 팔릴 거 같은 책 있으면 꼭 인세 계약하자고 해.” 

“당연하죠, 다음에는 완전 초.초.초대박 나는 책 한 권 해야 할 텐데.” 


그 일 덕에 나는 출판 번역 기획서를 완성한 책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됐다. 이를테면 기획서를 여기저기 보내도 바라던 성과가 없을 때면 생각한다. 


‘당장은 아니지만 출판사나 독자가 원하는 때가 다시 올지 몰라. 아니면 이번에 보낸 출판사들은 아니지만 이 책을 원하는 다른 출판사가 있을 수도 있지. 적어도 내가 고른 책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지는 말자. 내가 포기하면 누가 그 책들에 눈길을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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