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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Oct 01. 2023

새로운 시작, 냥이님 덕분입니다

기세 좋게 홀로서기를 선언했지만 당장 어느 출판사에서 함께 일해 보자며 번역 의뢰를 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나는 우선 구직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설마 이런 구직 사이트에서 책 번역할 사람을 찾는 회사가 있을까?’ 

의심과 불신으로 검색에 나섰지만 맙소사, 그런 출판사가 있었다! 


‘고양이와 관련 된 272페이지 분량의 책을 번역할 번역가를 찾습니다.’ 

내게만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3D처럼 떠오른 번역가 구인 광고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구직 사이트에서 흔하지 않은 출판 번역가를 찾는 광고를 보게 되다니, 운과 때가 맞았다고 해야 하나. 


‘고양이 책인데 분량이 272페이지나 된다고? 보통 중국어 책은 분량이 1.5배 정도 늘어나니까 한국어로 번역하면 400페이지가 넘을 거 아냐? 와, 대박인데. 독립 기념으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되면 나쁘지 않겠는데.’ 


행복한 상상에 빠진 나는 번역 단가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 채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일단 출판사에 메일로 이력서를 보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연락을 왔으니 어떻게든 이 책의 번역을 따 내야겠다는 의욕이 가득 차올랐다. 


“정세경 선생님? 혹시 번역은 얼마나 해 보셨나요?”

“출판 번역을 한지 8, 9년 정도 됐고, 책으로는 열일곱 권 정도 됩니다.” 

“어머나, 번역 경력이 상당하시네요.”


면접에서 편집자에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돈은 안 되고 일만 힘들다고 투덜댔던 지난 세월이 그저 허투루 흘러 온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큰돈도 벌지 못하고 어영부영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시간 동안 한 권, 두 권 번역했던 책들이 어느새 내 자랑스러운 커리어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때 다시 한번 세상에 헛된 경험은 하나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아마 지난 9년 동안 조금씩이라도 책을 꾸준히 번역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그 고양이 책의 번역을 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번역을 맡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번역 단가였다. 보통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겼을 때 책의 번역 단가는 200자 원고지 장당 얼마로 정해진다. 예를 들어 중국 책을 한국어로 옮긴다면 한국어 원고를 기준으로 200자 원고지 한 장에 얼마로 번역료를 계산하는 것이다. 이런 번역료 계산 방식을 매절이라고 하는데 번역가가 작업한 만큼만 번역료를 받는 셈법이라고 보면 된다. 


이를테면 출판사와 200자 원고지 장당 3천 원으로 계약을 했을 경우 번역한 원고의 분량이 총 1,500매라면 450만 원의 번역료를 받게 되는 것이다. 프리랜서이다 보니 그 번역료에서 3.3%의 세금을 미리 떼고 주긴 하지만. 


이 외에도 번역가는 인세로 번역료를 받을 수도 있다. 내가 번역한 만큼의 번역료를 받는 매절과 달리 인세 계약은 내가 번역한 책이 팔린 숫자만큼의 번역료를 받게 된다. 이런 방식의 번역료 지급 계약은 번역가 입장에서 모 아니면 도가 될 수 있다. 책이 많이 팔리면 그만큼 많은 번역료를 받을 수 있지만 책이 초판도 다 팔리지 않으면 초판 인세만 받고 손을 털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번역가에게 지급하는 초판 인세는 매절로 계약했을 때보다 훨씬 적은 경우가 많다. 책이 분량이 많을수록 더욱 그렇다. 때문에 많은 번역가들은 무리하게 인세 계약을 하기보다 매절 계약을 선호하는 편이다. 게다가 이 인세 계약은 번역가가 원한다고 해서 척척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출판사가 인세로 계약을 하겠다고 동의를 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번역가는 매절 계약을 할 수밖에 없다. 당시 고양이 책을 번역하게 된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출판사에서 제시한 번역 단가가 너무 낮다는 것이었다. 


“번역 단가를 좀 더 조정해 주실 순 없을까요? 이 정도면 제가 번역 에이전시에서 받았던 번역료나 비슷한데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정해진 예산이 있어서요. 저희 출판사와 첫 작업이니까 다음에 다른 작품을 함께 하게 되면 그때는 꼭 올려 드릴게요.” 

“하지만 이 책은 고양이를 어떻게 키우는 지에 관한 책이라 수의학 지식도 많이 나오고, 자료 조사할 부분도 많은데 난이도를 감안하면 제시해 주신 번역 단가는 너무 낮은데요.” 

“저희도 알죠. 그런데 저희가 이 단가에 맞는 번역가님을 찾는 거라서요.” 


창과 방패의 대결처럼 협상을 시도했지만 출판사에서 미리 정해 놓은 가격만을 고집하니 이제 막 진정한 전업 번역가로 거듭난 내게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 번역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번역가를 찾겠다니 결국 아쉬운 사람이 백기를 들 수밖에. 그나마 나는 ‘혼자서 첫 일감을 따냈다는 것에 만족하자.’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번역 에이전시와 관계를 정리한 뒤 첫 번역이 시작됐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어떤 책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첫인사를 나누게 된 책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사실 동물과 관련된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이 처음이기도 했고, 책의 내용 자체가 고양이의 입양부터 죽음까지를 빠짐없이 다루고 있을 만큼 방대했기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타이완의 고양이 병원 원장님 두 분이 쓴 그 책은 제목에 이미 ‘대백과’란 단어가 들어 있어 내용이 얼마나 전문적이고 다양한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고양이계의 ‘삐뽀삐뽀 119’ 같은 책이었다고나 할까. 책이 출간됐던 2015년에는 고양이나 개를 키우는 법에 관련된 책들이 서점에 나와 있긴 했지만 내가 번역한 이 아이만큼 내용이 상세한 책은 드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처음 보며 생각했다. ‘이런 책이 팔리나?’ 실제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아무리 요즘 고양이를 많이 키운다고 해도 400페이지나 되는 책을 돈 주고 사서 볼까?”  

“개나 고양이 키우는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돈을 팍팍 쓴다던데?” 

“그래도 그럴 돈이 있으면 고양이 간식이나 장난감을 사지 고양이 키우는 법이 나온 책을 볼까? 일반 책도 잘 안 읽는데 굳이 이런 책을 읽으려고 하겠어? 이 책은 몇 개월에는 무슨 예방 접종하고, 무슨 전염병을 조심해라 이런 내용까지 다 나온다니까? 엄청 골치 아파. 어떻게 보면 수의학 책이랑 비슷해. 타이완 사람들은 워낙 고양이를 좋아하니까 고양이 병원도 따로 있어서 원장 선생님이 이런 책도 쓰나 본데 우리나라에도 정말 이런 책에 수요가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출판사에서는 읽을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서 내는 거 아냐?” 

“그렇긴 할 텐데, 출판사에서 초판을 낼 때 보통 2, 3천 권은 찍거든. 근데 자기 계발서 같은 책도 초판을 다 못 파는 경우가 허다한데 동물 책이 그 이상 팔린다고?” 


내 돈으로 만드는 책도 아닌데 나름 경력이 쌓여서 그런지 품을 많이 들인 이 책이 잘 팔릴지 지레 걱정이 됐다.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빈번하게 등장하는 수의학 관련 용어 때문에 따로 자료 조사를 해야 했고, 타이완과 한국에서 쓰는 전문 용어가 다를 경우를 생각해 단어 선택을 하며 몇 번이고 확인을 반복했다. 무엇보다 어릴 때 금붕어와 병아리를 키워 본 걸 빼면 동물을 키운 적이 없었기에 고양이를 키우는 독자들의 감성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당시 이 책은 번역 기간만 두 달이 걸렸고, 혹시나 모를 오류를 잡아내고자 수의사 선생님께 따로 감수를 받기도 했다. 감수를 받은 뒤에는 내가 다시 원고를 수정해야 했기 때문에 마무리 작업까지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다. 


그렇게 긴 번역과 편집 작업을 거쳐 책이 출간됐을 때 나는 대형 서점을 찾아 매대 주위를 맴돌았다. 심지어 매대 위에 곱게 자리 잡은 책의 사진을 휴대전화로 찍기도 했다. 열여덟 번째 역서가 나왔을 뿐인데 꼭 첫 번역서를 냈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렜다. 번역가로서 완전히 독립을 하고 처음 맡은 책이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고양이의 A부터 Z까지 모두 소개된 이 두꺼운 책이 정말 팔리긴 팔릴지 여전히 걱정이 되긴 했다. 그때까지 내게 팔리는 책이란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 같은 장르뿐이었다. 


그런데 책이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출판사로부터 책이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판을 다 팔아 치운 책은 금세 두 번째 인쇄에 들어갔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으응? 진짜로 그 두껍고 어려운 고양이 책을 보는 독자들이 있다고? 내 고양이를 위해서는 그 정도로 공부할 자세가 되어 있는 거야? 고양이가 이렇게 인기 있는 존재였어?’


나름 독자들의 취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편견이 보기 좋게 깨진 순간이었다. ‘팔리는 책은 따로 있다. 독자들의 취향은 지극히 대중적이다. 대중적인 책이 돈이 된다.’ 이렇게만 생각했던 나는 독자들의 취향이 생각보다 다양하며 오히려 특정한 분야에 관한 전문 지식을 소개한 책들을 원하는 수요층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를테면 고양이 책은 오십만 권, 백만 권 대중적으로 폭넓게 팔릴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만 권, 이만 권 팔릴 수요가 있는 책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독자들의 취향은 이럴 것이다.’라며 쉽게 단정 짓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안 될 거라며 속단하기보다 좀 더 넓은 시야로 독자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냥이님 덕분에 진짜 전업 번역가로서 첫발도 내딛고, 앞으로 어떤 책들을 찾아야 할지도 깨달았으니 내게는 정말로 감사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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