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두 편 엎어진 뒤 궁여지책으로 번역 에이전시에 취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퇴사한 나는 다시 영화사로 돌아갔다.
그 뒤 두 편의 영화를 더 준비했고, 또 다시 엎어지고 엎어졌다.
다행히 그 중에 한 편은 계약을 했던지라 스크립터로서 계약금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영화쟁이로 복귀해 마음이 편해진 것은 다행이었지만 배가 고픈 것은 여전했다.
그나마 번역 에이전시를 그만두며 '번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 내게는 감사한 일이었다.
배고픈 영화일을 하며 번역이란 부업을 병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역을 한다고 해서 경제형편이 대단히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번역도 페이가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번역은 출판번역이라
기술번역에 비하면 일도 드문드문 있는데다 이제 막 시작한 번역가의 번역 단가가 높을 리 없었다.
더구나 얼마 되지도 않는 번역료를 수수료 명목으로 번역 에이전시와 나눠야 했으니
250페이지쯤 되는 책 한 권을 번역해도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첫 번째 책을 번역하고 80만 원이 채 안 되는 번역료를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도 가난한 영화쟁이에게 가끔 들어오는 번역료는 가뭄의 단비였다.
그때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없는 돈을 쪼개고 또 쪼개 쓰며 살아낼 수 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다시 준비하게 된 영화 두 편도 연이어 엎어졌고 나는 현장이고 나발이고
더 이상 영화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번역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믿는 구석이 있어
더 쉽게 영화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햇수로 3, 4년 몸 담았던 영화판을 뒤로 하고
나는 온전히 번역가가 됐다. 많아야 일 년에 두세 권 번역을 했지만 번역이 내 주수입원이 됐다.
사실 그때도 나는 수수료를 나눠야 하는 번역 에이전시로부터 일감을 받고 있었다.
번역 에이전시의 장점은 내가 직접 일거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에이전시에서
어울릴 만한 책을 소개해줬고, 나는 샘플 번역을 해서 통과가 되면 책을 번역하면 됐다.
간간히 책의 검토서를 쓰는 일도 함께 했다. 검토서란 리뷰라고도 하는데 출판사에서 한 책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의뢰하면 번역가가 책을 다 읽고 기본 정보는 물론이고, 목차와 줄거리, 책의 장점과 단점,
예상 독자, 마케팅 포인트 등을 정리해주는 것을 말한다.
이 책들은 내가 번역하려고 살펴 봤던 책들이거나 내가 번역해서 출간된 책들의 일부다.
일일이 내가 번역한지 얼마나 됐나 헤아려본 적은 없지만 이 글을 쓰려고 계산해보니 첫 책이
나온 해를 기준으로 벌써 12년이 흘렀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번역 작업을 해오면서도
나는 스스로 번역가라든지, 번역이 내 본업이라고 생각한 것이 불과 4,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본래 내 꿈은 드라마 대본이나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앞선 글('3. 스팸 메일, 다시 만난 중국어' 참조)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상당히 오랜 기간 꿈을 꿨고 습작을 했으며 나름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간절히 바라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그것이 제아무리 간절한 꿈이라 해도 말이다.
흔한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애타게 꿈꾸면 이루어진다' 같은 말은 누군가에게는 사실이 아니다.
반면 때로는 누군가 애타게 바라는 어떤 일이 내게는 거저 받아든 선물이 될 수도 있다.
번역이 내게는 그랬다. 살면서 진지하게 번역가가 돼야겠다고 꿈꾼 적도 없었고,
상식적으로 번역가가 될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는
하루아침에 번역을 하고 있었다. 중국어를 전공한 적도, 번역을 공부한 적도 없는 내가 말이다.
그렇게 거저 얻은 선물이기에 나는 번역의 소중함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드라마나 영화 작가로
가기 위해 도움이 되는 부업 정도로만 여겼다. 오히려 번역을 내 본업이라고 인정하기 싫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작가가 될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돈도 안 되는 번역을
수동적으로 하는 번역가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5년 전쯤 이런 내 생각에 전환이 일어나는 계기가 있었다.
어떤 의뢰자의 부탁으로 자료를 하나 찾고 있었는데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도무지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에 번역가와 번역가 지망생을 위한 카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혹시나
자료를 찾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 카페에 가입하게 됐다.
원하는 자료는 찾을 수 없었지만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번역가가 되기를 꿈꾸는지 알게 됐다.
번역가가 되기 위해 매일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하고, 번역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통번역대에 지원하고,
여기저기 번역 에이전시나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많은 예비 번역가들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는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온 꿈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하는 번역이 그들에게는 내가 평생 꿈꿔온 작가와 같았던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니 나는 번역이 내 본업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또한 번역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자세도 달라지게 됐다. 나는 과감히 번역 에이전시와 관계를 끊었다.
누가 던져주는 일감을 수동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책을 번역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물론 당장 일감을 구하기 어려우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더 나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수수료를 떼줄 일 없이 내가 직접 출판사와 번역 단가를 합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7, 8년을 무늬만 번역가로 살아온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진짜 번역가가 되는 길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