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번역가들의 열정에 감동해 홀로서기를 선언했던 그 무렵, 나는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통해 고양이 책 말고 다른 책의 번역도 맡을 수 있었다. 공자와 맹자 등 동양 철학에 관한 책이었는데 분량도 적당했고 내용도 내 취향이었다. 다만 출판사의 사장님을 만나 번역가 미팅을 할 때부터 뭔가 수상한 낌새가 느껴져 마음이 걸렸다.
“경력도 꽤 있으시고, 우리 책도 잘하실 거 같네.”
“감사합니다. 동양 철학 책도 번역한 경험이 있어서 맡겨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잘해 봅시다. 이게 중국의 아는 분이 소개한 책인데 콘셉트가 우리 출판사랑 잘 맞을 거 같더라고요.”
“그러시군요. 그럼 번역 계약서는……?”
“아, 번역 계약서요? 에이 뭐, 이 바닥에 다 아는 사람들인데 계약서가 꼭 필요합니까? 그냥 믿고 의리로 하는 거지. 돈 떼먹고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계약서도 없이 믿고 의리로 일을 한다는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돈 한 푼이 아쉬운 때였기 때문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예전에 번역서 없이 일했다가 고생한 적이 있어서요. 지금은 계약서 없이는 일을 안 합니다. 혹시 출판사에 따로 계약서 양식이 없으신가요?”
“글쎄, 뭐……. 꼭 그렇게 빡빡하게 해야 하나?”
사실 그때 번역을 맡지 않겠다고 발을 뺐다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배고픈 번역가였다.
“그럼 제가 직접 번역 계약서를 써 오겠습니다. 예전에 번역 에이전시랑 일해서 계약서 양식을 대강 알거든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출판사 사장도 무작정 안 쓰겠다고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내가 번역 계약서를 써서 다시 출판사를 찾았고, 양쪽의 도장을 쾅쾅 찍었다. 사실 번역가가 계약서를 써 가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과거 쓰라린 경험이 있었던 나는 계약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사에 다니던 시절 스크립터로 일하며 우리 영화 시나리오의 각색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영화가 엎어지면서 각색료를 받지 못했다. 당시 거기야말로 의리로 계약서를 쓰지 않았던 탓에 제작사 대표님의 오리발에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마저 없었다. 번역가가 된 뒤에도 나는 늘 그 일을 떠올리며 계약서를 꼼꼼히 챙기게 됐다. 그런데 초장부터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더라니, 두 달 동안의 번역 작업을 마치고 원고를 넘긴 뒤 기어코 사달이 났다.
“괜찮은 책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소개 받은 거랑 내용이 좀 다르네. 이건 괜히 돈 들여 출간하느니 그냥 사장시키는 게 낫겠어요.”
원고를 보내고, 사장님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번역을 다 끝낸 책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책이 나오든 아니든 번역가는 번역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 계약서에도 분명 ‘완고’를 보내고 15일 안에 잔금을 지불하기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약속한 날짜로부터 일주일이 넘도록 번역료가 들어오지 않았다. 번역을 시작하며 계약금을 받았던 나는 갑자기 잔금을 떼일 위기에 놓였다. 공을 들여 번역한 책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것도 속상했지만 번역료를 떼이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미래였다.
“에이, 설마 몇 푼 되지도 않는 번역료 잔금을 안 주는 양아치는 아니겠지.”
애써 현실을 부인하며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는 처음에 일주일 뒤에 주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보름 뒤에 주겠다는 식으로 잔금의 지급을 미뤘다. 가뜩이나 번역료 단가도 낮게 책정했는데 일만 시키고 잔금을 안 주겠다고? 워낙 성격이 소심한 데다 이왕이면 좋게 해결하고 싶었던 나는 기다릴 수 있는 데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번역가는 출판사 앞에서‘을’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없는 용기를 쥐어 짜내 출판사를 직접 찾았다. 극강의 ‘I’인 내게 돈을 못 받았다고 출판사를 찾아 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맞댄 사장님은 소심한 번역가를 요즘 말로 ‘각성’하게 만들었다.
“저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습니다. 알아보니 번역료 잔금을 주지 않으신 것에 대해 내용 증명을 보낼 수도 있고……. 압류를 하는 방법도 있다던데요.”
“뭘 잘 모르시나 본데 법적으로 압류가 들어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에요. 나도 다른 회사에 압류를 걸어 봐서 아는데 그게 시간이 꽤 걸립디다. 아마 부동산이나 여기 집기 같은 유체동산의 압류 결정을 받아도 돈을 받는 데까지 6개월은 걸릴걸요?”
일을 시키고 돈은 안 주겠다는 말을 지금 이렇게 뻔뻔하게 한다고? 순간 나는 머리 뚜껑이 확 날아갈 뻔했다. ‘벼룩의 간을 내먹지 감히 없이 사는 번역가의 돈을 떼먹어? 사람 잘못 보셨네.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이 번역료만큼은 받아 내고 만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저도 법적으로 제가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하겠습니다.”
사장님께 나름의 선전포고를 한 뒤 일어선 나는 15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번역료 잔금을 받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때부터는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번역가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하지만 가난한 번역가가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겠다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무료로 상담이 가능하다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을 찾았고, 거기 변호사님의 코치를 받아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나는 법이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절차는 복잡했고, 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겠다고 이렇게 몇 달씩 고생을 해야 하나? 그냥 포기할까?’ 이런 생각이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포기하면? 그럼 정말 다 끝나는 걸까?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그 출판사 사장님은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번역가의 돈을 떼먹으려 할 거 아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선례가 생기면 안 되는 거잖아.’
무엇보다 나는 포기하는 습관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한 번 포기하면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쉽게 포기할 것만 같아 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유리 멘탈을 부여잡고 버티고 또 버텼다.
그로부터 넉 달 뒤, 나는 무사히 남은 번역료 잔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007 뺨치는 작전으로 출판사의 거래 은행 계좌번호를 알아낸 끝에 통장에 압류를 걸었고, 출판사 1층에 있는 거래 은행까지 직접 찾아가 지급 정지가 된 출판사 통장에서 내 몫의 번역료를 찾았다. 안도감과 함께 허탈감이 동시에 몰려 왔지만 포기하지 않길 정말 잘했다고 나 자신을 칭찬했다.
어쩐지 내 유리 멘탈에도 얇지만 단단한 코팅 한 겹쯤은 덧씌워진 것만 같아 가슴이 뿌듯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