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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Oct 01. 2023

국영 오빠, 홍콩에서 미션 완수했어요!

장국영 오빠 때문인지 홍콩하면 왠지 모를 노스탤지어가 느껴진다. 거기가 고향이거나 국영 오빠와 직접 아는 아니도 아닌데 홍콩을 떠올리면 뭔가 그리운 느낌이 든다. 일종의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완벽한 전업 번역가가 됐던 해 여름, 나는 조카를 데리고 홍콩으로 방학 여행을 가기로 했다. 지금은 어엿한 고등학생인 조카는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2학년의 꼬맹이었다. 큰조카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는 나는 방학 때마다 종종 여행을 다니곤 했다. 진부한 말이지만 아이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홍콩 가는 거야. 어때 너도 좋지?” 

“응, 좋아. 홍콩 가면 어디 가는데?” 

“우리 꼬까둥이가 좋아하는 디즈니랜드도 가고, 높은 빌딩 꼭대기 층 카페에 가서 애프터눈티도 마시고, 엄청 긴 에스컬레이터도 탈 거야. 또 산을 따라 철길을 올라가는 피크 트램도 타고, 유명한 스타들을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 놓은 마담 투소 박물관도 갈 거지롱. 엄청 재미있겠지?” 

“응응, 홍콩 빨리 가고 싶어!” 


조카를 데리고 홍콩에 갈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마냥 즐겁고 신나는 여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여행 못 가는 병에 걸린 사람인 나는 3박 4일의 여행 계획도 꼼꼼하고 철저하게 세웠다. 조카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여행 사흘째 되는 날 홍콩에서 제일 큰 서점에 들른 일정을 계획표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중국으로 서점 투어를 다녀온 뒤라 홍콩 여행은 사실 나의 두 번째 서점 투어였다. 다만 홍콩은 자체적으로 출간되는 책이 적은 편이라 서점 투어만을 위해 가기에는 돈을 쓰기가 아깝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조카를 함께 데려가면 어떨까?’겸사겸사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행을 며칠 앞두고 배탈이 나고 말았다. 여행 가서 예쁜 사진 찍겠다며 한 달 전부터 닭 가슴살만 먹으며 무리한 다이어트를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위장이 약해 늘 “배 아파.”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나는 그게 비극의 전조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 뒤 조카와 함께 예정대로 홍콩으로 떠났다. 하지만 이른 새벽 인천 공항행 지하철을 탔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배앓이가 시작됐다. 어찌저찌 도착한 8월의 홍콩은 숨이 턱 막힐 만큼 습한 날씨를 자랑했다. 컨디션은 최악이었지만 조카를 생각해 계획에 맞춰 여행을 강행했다.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의 촬영지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며 여주인공 흉내도 내고, 빅토리아 피크까지 올라가는 트램도 탔다. 또한 말로만 들었던 마담 투소 밀랍 인형 박물관도 들렀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 국영 오빠의 미모를 반도 구현해 내지 못한 말도 안 되는 밀랍 인형을 보고 하마터면 뒷목을 잡을 뻔했다. 


배우 유덕화도, 여명도 분명 쏙 빼닮게 만들어 놓았는데 장국영 오빠는 정말 어디가 닮은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영화 〈야반가성〉 속 옷차림이 아니었다면 그 괴상한 밀랍 인형이 국영 오빠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팬이라서가 아니라 지나는 사람마다 “저 인형은 누구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속이 상했지만 내심 생각했다. 


‘그래, 인간의 손으로 우리 국영 오빠의 아름다움을 흉내 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렇게 아픈 몸을 이끌고 간신히 하루 일정을 마친 뒤 호텔로 돌아가려고 홍콩 지하철인 MTR로 향했다. 지하철역에 도착해서도 배앓이는 멈추지 않았다. 


“죄송한데 역사 안에 화장실이 어디 있나요?” 

“MTR 역에는 화장실이 없어요.”

“예? 지하철에 화장실이 없다고요?” 


역사 안 편의점 직원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묻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십장생, 여기 사람들은 위장이 강철로 만들어졌나? 지하철역에 화장실이 없는 게 말이 돼?’ 욕이 절로 나왔지만 억지로 참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른 새벽부터 계속된 여행이 힘들었던지 조카는 금세 새근새근 꿈나라로 떠나 버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부터 나는 생사를 건 사투를 시작했다. 


본래 사람의 몸은 한밤중이나 새벽에 더 아파지게 마련. 세상모르고 자는 조카와 달리 나는 밤새 위아래로 쏟아내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둘째 날 겁나게 맛있는 애프터눈티를 먹으러 간다고 조카에게 철석 같이 약속했지만 배앓이는 정신력만으로 참아 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일단 둘째 날 오전 일정을 포기하고 호텔 근처 작은 내과에 들러 약을 처방받았다. 어떻게든 빨리 나으려고 오전에만 약을 두 번이나 먹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나중에는 배가 너무 아파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안 되겠다. 살려면 큰 병원에 가야 돼.’ 

몸이 적색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근처 대형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호텔에 부탁했다. 직원은 홍콩의 구급차 비용이 굉장히 비싸다고 안내해 줬지만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구급차! 사람 죽겠어요. 구급차 좀 불러 주세요!” 


잠시 뒤, 난생처음 구급차를 타고 대형 병원으로 향했다. 머나먼 남의 나라 홍콩에서 조카와 구급차를 타게 될 줄이야.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고 뭔가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별다른 검사도 없이 병원 사람들이 우리를 작은 방에 들여보냈다. 


‘뭐지? 사람이 배가 아프다는데 뭔 검사도 없이 이런 데 가둬?’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것도 잠시, 우주인처럼 엄청난 소독복을 입은 간호사가 나타나 무슨 검사를 하고 나갔다. 사실 그때는 너무 배가 아파 무슨 검사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소독복을 입은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이도 환자분처럼 열이 난다든지 구토를 하고, 배가 아픈 증상이 있나요?”

“아뇨, 조카는 멀쩡한데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는 그냥 배가 아픈 건데 무슨 주사나 링거라도 맞을 수 없을까요?”

“아, 잠시만요.” 


내 간절한 요청에도 간호사는 쌩하니 사라졌다. 마치 무슨 전염병이라도 옮을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이게 대체 뭐지?’ 의아함도 잠시, 병원에서는 나와 조카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통보했다. 중국어도 못하는 조카를 나와 분리하겠다니 황당했지만 병원에서 그래야한다니 별수가 없었다. 도움이라도 받으려고 홍콩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전화했지만 나올 수 있는 직원이 없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조카는 병원 경비원 아주머니가 돌봐 주시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간호사를 따라 이중, 삼중의 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처음 보는 광경에 눈만 데구루루 굴리다 안에 들어가니 커다란 병실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어느새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있자니 역시나 소독복을 입은 의사 둘이 들어와 자기들끼리 광둥어로 뭐라뭐라 떠들어 댔다. 


“저기요. 제가 중국어 보통화를 할 줄 아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말씀 좀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예? 보통화를 할 줄 알아요? 이 환자 중국어 한다고 왜 아무도 말 안 했어?”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전 그냥 배가 아파서 여기 온 건데 이게 무슨 일이죠?” 

“아……. 그냥 배만 아픈 겁니까?” 

“예, 그렇다니까요. 제가 원래 배가 자주 아픈데 주사나 링거 좀 놔 주시면 안 돼요?” 

“아……,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모든 게 의문투성이었지만 의사들은 제 할 말만 하고 또 사라졌다. 그 상태로 나는 몇 시간이나 넓지만 꽉 막힌 병실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사람이 배가 아프다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야? 국영 오빠, 저 아무래도 여기서 죽나 봐요. 오빠 영화 <아비정전> 속의 아비를 만나고 싶었는데 이러다 한국에 계신 아비랑 영영 이별하겠어요. 듣고 계세요, 국영 오빠?’ 


정말 별놈의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홀랑 지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다며 퇴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뭔 검사를 했는데 뭐가 이상이 없다는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병원에 더 있어 봐야 조카와의 생이별만 길어질 것 같아 퇴원을 하기로 했다. 


신나는 홍콩 여행 대신 병원 여행만 실컷 한 조카를 데리고 병원비를 내러 갔던 나는 청구서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89만 원? 아무 조치도 안 받고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던 것밖에 없는데 한국 돈으로 89만 원이라고?’ 그제야 구급치 비용이 비싸다며 걱정했던 호텔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조각난 모든 상황을 이리저리 맞춰 보던 끝에 나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추측할 수 있었다. 당시는 2015년 8월로 한국에서는 5월부터 호흡기성 전염병인 메르스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증상은 마침 메르스와 유사했고, 병원 의료진은 한국에서 온 나를 일단 메르스 환자로 의심한 것이다. 이미 사스로 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경험이 있던 홍콩이었으니 메르스가 유행하던 시절 한국에서 온 나를 전염병 환자로 의심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 코로나가 유행하고 나서야 나는 홍콩 병원에서 혼자 누워 있었던 곳이 음압 병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쨌든 비싼 돈을 내고 홍콩까지 날아 와 하루 일정이 몽땅 날아간 것도 아까웠지만 문제는 남은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꼬까야, 디즈니랜드 가고 싶니?” 

“응, 가고 싶어! 내일은 디즈니랜드 꼭 가는 거지?” 

“그,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디즈니랜드는 가야지, 암.”


여행 사흘째 일정에는 무려 홍콩 디즈니랜드와 서점 방문이 있었다. 홍콩에 온 조카의 목적과 나의 목적이 모두 들어 있으니 어떻게든 일정을 완수해야 했다. 즐기려고 온 여행이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미션이 된 기분이었다. 여전히 배가 아팠지만 하루 병원에 누워 있었던 덕인지 억지로 움직일 순 있었다. 


심지어 나는 엉망진창인 컨디션으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가는 고속 열차도 타고 공중에서 그네처럼 크게 스윙 운동을 하는 놀이기구도 탔다. 뭔가를 먹으면 배가 아팠기 때문에 밥도 조카에게만 먹이고 강행군을 거듭했다.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디즈니랜드에 조카가 실망했지만 일단 미션 하나는 완수할 수 있었다. 저녁이 되기 전, 디즈니랜드를 나온 나는 조카에게 말했다. 


“꼬까야, 사실… 우리 호텔에 가기 전에 갈 데가 있어.”

“어디를 가? 나 피곤한데.”

“서, 서점에 가야 돼. 고모가 번역할 책을 좀 골라야 하거든.” 

“힘든데. 그냥 호텔 가면 안 돼?”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줄게. 꼬까가 고모 좀 도와 주라, 응?” 


평소 고모의 사정 따위 관심도 없는 조카였지만 나름 하루 전 병원에서 의젓하게 하루를 보낸 뒤여서 그런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길로 다시 MTR을 타고 서점으로 달려갔다. 전에도 혼자 홍콩 여행을 와 본 적은 있었지만 서점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홍콩에 여행을 오는 사람치고 서점에 들르는 여행객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책을 고르러 오다니, 번역으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러나 싶어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여행을 온 목적을 이룰 수 있어 다행이란 안도감도 들었다. 


어쨌든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한 나는 유난히 작가의 사진이 눈에 많이 띄는 책들을 살펴봤다. ‘곳곳에 이 작가 얼굴이 박힌 책들이 있는 걸 보면 유명한 작가인가 본데?’ 사실 그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에세이 한 권을 골랐다. 


이튿날 다시 초인적인 정신력을 쥐어 짜내 공항으로 향했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새삼 사람의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마 지켜야 할 조카가 없었다면 나는 패닉에 빠져 사흘 내내 남의 나라에서 어쩔 줄 몰라했을 것이다. 조카 때문에 무리한 일정을 강행하기도 했지만 조카 덕분에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책 표지에 박힌 작가 사진 때문에 골랐던 에세이는 내가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쓰고 번역을 해 출간된 첫 책이 됐다. 국내에 거의 소개된 적이 없는 홍콩 작가의 책이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미션을 완수해 낸 끝에 드디어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쓴다고 어디서든 말할 수 있는 전업 번역가가 된 것이다. 


진창을 구르면서도 향기로운 꽃을 피워 내는 연꽃처럼 천신만고 끝에 작지만 귀한 성취를 이뤄 낸 홍콩 여행은 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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