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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Oct 02. 2023

보따리상이라도 좋다, 좋은 책 팝니다

“함께 작업할 수 있게 돼서 정말 좋네요.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열심히 번역하겠습니다.” 

“근데 저희 출판사는 사실 중화권 책 자체가 첫 계약이거든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번역 계약하러 가면 중화권 책은 아예 처음이라고 하는 출판사가 많으시더라고요. 번역서는 주로 영미권이나 일본 책을 내니까요.”  

“그래서 중화권에도 괜찮은 책이 있으면 앞으로 더 출간할 생각이 있는데 혹시 소개해 주실 만한 책이 있을까요?” 

“아, 그러세요? 안 그래도 제가 A출판사에서 관심이 있으실 만한 책 몇 권을 챙겨 왔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어머, 정말요? 어떤 책인데요?” 

“A출판사는 아동서를 주로 내시니까 그림책이랑 어린이 과학책을 가져 왔는데 실물로 보시겠어요? 좀 더 자세한 검토를 원하시면 제가 쓴 출판 번역 기획서를 나중에 편집자님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출판사의 의뢰로 그림책 번역 계약을 하러 간 사무실에서 뜬금없이 커다란 에코백 속 책들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누가 봤다면 그런 내 모습이 흡사 보따리상 같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책 한 권이라도 더 팔 수 있다면 뭐처럼 보이던 무슨 대수겠어.    


번역가 9년차에 전업 번역가로 홀로서기한 뒤로 나는 굉장히 많은 출판 번역 기획서를 작성했다. 

대개는 내가 한국에 소개하고 싶은 책을 기획서로 작성한 뒤 그 책을 낼 법한 출판사를 일일이 찾아 기획서를 첨부한 메일을 보내고 답을 기다린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출판사에 계약을 하러 갔다 책을 소개하기도 한다. 


직접 일감을 찾기 시작하면서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쓰는 것은 나의 흔한 일상이 됐다. 처음 9년 동안은 남이 주는 일감을 수동적으로 받아서 했다면 그 이후의 9년은 훨씬 능동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책 위주로 번역을 했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 독립하고 나서 번역한 책이 30여권 정도 되는데 직접 쓴 출판 번역 기획서로 출판사들의 선택을 받아 번역하게 된 책이 그중에 20권이나 됐다. 그만큼 나는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쓰는 일에 아등바등 매달렸고, 책을 팔 수 있다면 기꺼이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한동안 유일한 생계 수단이기도 했지만 나는 지속할수록 출판 번역이 좋아졌다. 적성에도 잘 맞는 데다 내 취향의 책들을 찾고 우리말로 옮기는 일 자체가 꽤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영상이나 게임, 기술 번역을 해 보겠느냐는 제안도 가끔 있었지만 다른 분야의 번역은 흥미도, 자신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도 큰돈 못 버는 번역가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진짜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고집쟁이였기에 이런 번역가의 생활도 결국 내 스스로 만든 상황임을 잘 알고 있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먹고살기 위해서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도 나는 뻔뻔한 보따리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출판 번역 기획서를 보내고 거절 메일 하나만 받아도 마음에 상처를 입곤 했다. 하지만 도둑질도 한 번이 힘들지 두 번, 세 번 하면 익숙해진다고 지금은 ‘흥, 그래. 거절하려면 해라. 다른 데 또 보내면 되지.’라고 코웃음을 칠 정도로 제법 담대해졌다. 번역 계약을 하러 가서 그 출판사 사람들에게 직접 가져간 책을 소개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루틴이 됐다. 


“선생님, 웹소설 번역은 처음이시죠?” 

“예, 근데 전부터 재밌겠다고 눈여겨 본 작품을 맡게 돼서 신기한 인연이다 싶어요.” 


언젠간 한번은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쓰고 싶었던 웹소설이 있었는데 이미 출판 저작권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 그 웹소설의 공동 번역을 의뢰받게 됐다. 출판사로부터 내가 소개하려 한 웹소설 작품의 번역을 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세상에 번역할 작품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이 작품이 나랑 무슨 인연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하며 번역 계약을 하러 찾아간 출판사에서 나는 다시 익숙하게 화제를 꺼냈다. 


“B출판사는 원래 웹소설이나 웹툰만 주로 하시나요?” 

“예, 그렇긴 한데 종이책도 내기는 내요.” 

“아, 그러세요? 이사님도 종이책에 관심이 있으세요?” 

“괜찮은 책 있으면 내고 싶죠.”

“그럼… 혹시 몰라서 제가 B출판사에 소개하고 싶은 책을 몇 권 가져 왔는데요. 한번 보시겠어요?” 

“정말요? 무슨 책인데요?” 

“어떤 책을 좋아하실지 몰라 여러 권을 가져 왔는데 따로 관심 있으신 장르가 있으시면 기획서를 보내 드릴 수도 있어요.” 


타고난 소심쟁이답게 귓불이 붉어졌지만 애써 태연한 척 에코백에서 책들을 끄집어냈다.  


“여기 있는 책들은 다 출판 번역 기획서가 있나요?” 

“예, 전부 있어요. 좀 더 검토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진짜로 책들이 분야별로 다양하네요.” 

“먹고살려다 보니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하하.” 

“어머, 이거 재미있어 보인다. 한동안 이거 소재로 다룬 책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네네, 그렇죠. 안 그래도 그 책이 시리즈인데 타이완에서 베스트셀러에다 스테디셀러로 히트한 작품이에요. 지금까지 다섯 권이 나왔는데…….” 

“아, 그래요? 그럼 1권만 내 보고 반응이 괜찮으면 다른 책들도 내도 되겠네요.” 

“그러셔도 되죠. 시리즈를 다 하시려면 부담이 되니까요.” 


그날 나는 어깨가 빠지도록 매고 간 책들 중에 고양이 에세이 한 권을 출판사에 팔 수 있었다. 실제로 책을 팔았다는 말은 아니고 출판사에서 그 책을 출간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 책은 그 출판사에 소개하기 2년 전에 이미 출판 번역 기획서를 써 놓았던 녀석이었다. 괜찮은 콘셉트의 책인데도 하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어 묵혀만 두고 있던 아이인데 이렇게 몇 번이고 여기저기 끈질기게 소개한 끝에 한국에서 출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오래 인연을 맺지 못하던 책들이 국내에서 빛을 볼 수 있게 될 때면 나는 마치 책의 작가된 것처럼 뿌듯함을 느낀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글을 쓴 작가의 책이지만 번역가의 입장에서는 글을 옮긴 번역가의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만 해도 나는 1년에 한두 번은 꼭 번역할 책을 찾아 서점 투어를 떠났다. 덕분에 중국의 여러 도시는 물론이고 타이완의 대도시도 대부분 방문해 봤다. 처음에는 무식하게 여행 기간 내내 서점에 박혀 진짜 책만 찾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에는 하루 정도 그 도시를 여행하는 일정도 꼭 챙겼다. 또한 처음에는 어떤 책을 골라야 좋을지 몰라 손이 가는 대로 아무 책이나 사서 나중에 읽지 못하는 책들도 많았다. 


하지만 몇 번이고 서점 투어를 떠난 뒤에는 책을 고르는 나름의 기준도 생겼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아이들이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아마도 번역가에게는 번역 일을 하는 가장 큰 보람일 것이다. 


물론 출판사에서 어떤 책을 번역해 달라며 의뢰를 할 때도 기쁘기는 하다.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 나의 실력이 그만큼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출판사들과 독자들이 좋아할지를 고민하며 직접 고르고 정성껏 번역한 내 취향의 책들을 서점에서 만날 때면 번역이 단순한 돈벌이 이상의 것이란 사실을 가슴으로 깨닫게 된다. 또한 그 책을 좋은 번역 때문에 더 재밌게 읽었다는 감상평이라도 마주할 때면 큰돈 벌지 못하는 출판 번역가로 사는 삶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 보따리상이면 어떻고 가난한 번역가면 어때?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된 거지. 그래서 오늘도 외쳐 본다. 


“좋은 책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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