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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Oct 01. 2023

방아쇠수지 증후군을 아세요?

“어라, 이놈의 손가락이 왜 이러지?” 


몇 년 전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니 오른손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손목도, 손가락도 아프기는 했는데 하루아침에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게 되다니. 주먹을 쥐어 보려고 했지만 퉁퉁 부은 것처럼 손가락만 아플 뿐이었다. 


“엄마, 나 주먹이 안 쥐어진다!”

“얘는 뭔 시답지 않은 소리야? 어머, 너 손이 왜 이러니?”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내 손가락을 보고 어머니도 깜짝 놀라셨다. 한눈에 보기에도 손가락은 평소와 달리 한껏 통통해진 모습이었다. 


“그러지 말고 손가락을 이렇게 쥐었다 폈다 해 봐.” 

“아! 아픈데요.”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뭐라고 할까? 저릿하다고 해야 하나 아님 쑤신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통증이 심하게 느껴졌다. 


“아우, 너무 아파. 못하겠는데.”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얼른 다시 해 봐.” 


안 되도 되게 하는 정신의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몇 분 동안 오른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서서히 부었던 손가락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더니 불완전하게나마 주먹을 쥘 수 있었다. 


“어, 됐다. 아프긴 한데 괜찮은 거 같은데요.”  

“괜찮기는.  타자를 너무 많이 쳐서 그러는가 본데. 병원에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니?” 

“그런가? 근데 손목이나 손가락이 자주 아프긴 해도 이렇게 구부러지지 않는 적은 없었는데. 타자 좀 쳤다고 이럴 수가 있나? 에이, 설마 별일 없겠죠.” 


하지만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별일은 아침마다 반복됐다. 그럴 때마다 몇 분에 걸쳐 아픈 손가락을 억지로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하면 다시 주먹을 쥘 수 있었다.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손가락을 쓰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손이 정상이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마침 마감을 앞두고 있어 마음대로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누가 나 대신 번역을 해 주는 건 아니니까. 일단은 원고의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손이 아픈 건 무시하고 계속 번역에 매달렸다.


“엄마, 나 왼손도 안 구부러져요!” 


그런데 또 다른 어느 날 아침, 이번에는 양쪽 손의 손가락들이 죄다 구부러지지 않는 엄청난 별일이 발생했다. 오른손, 왼손을 가리지 않고 필러를 맞은 입술처럼 통통해진 손가락들은 큰 통증이 느껴졌다. 한 손만 그럴 때는 금방 좋아지겠거니 했는데 양손이 모두 같은 꼴이 되자 어쩐지 겁이 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진짜로 손가락이 고장 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러다 아예 손을 못 쓰게 되는 거 아냐?’


다행히 오른손이 그랬던 것처럼 몇 분 동안 낑낑대며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니 주먹을 쥘 수 있었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코앞에 닥친 마감 날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번역을 하면서 나는 마감 기한을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다. 그것이 번역가가 출판사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작업 초반이나 중반에 집안 일이 있다든지 게으름을 피우다 번역 일정이 밀릴 때는 종종 있었지만 완고를 넘겨야 하는 마감일만은 철저히 지켰다. 짧게나마 번역 에이전시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할 때 마감 기한을 지킬 수 없으니 아예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 버리는 무책임한 번역가들을 본 적이 있던 터라 유난히 더 마감에 대한 강박이 있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손이 아프기는 했지만 끝까지 책의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고 난 뒤에야 집 근처의 관절염과 류마티즘을 잘 본다는 병원을 찾았다. 엑스레이와 초음파를 찍은 다음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혹시 이게 류머티즘인가요?”


어디서 들어 본 건 있어서 이런 게 류머티즘이나 관절염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다. 


“아뇨, 이건 류머티즘이 아니고, 손가락 마디마디의 근육이 부은 겁니다.”

“근육이 부어요? 손가락 근육도 부을 수가 있어요?” 

“혹시 무슨 일을 하세요?” 

“번역가인데요.” 

“아, 타자를 많이 치시는구나? 이건 다른 치료법이랄 게 없고 쉬어 줘야 해요. 너무 무리를 하니까 손가락 마디마디가 부은 거예요. 그러니까 자고 일어나면 근육이 부어서 주먹이 안 쥐어지는 거고요.”

“아……, 그렇군요.” 

“손가락을 오래 쓰시려면 일을 쉬거나 줄이셔야 해요.” 

“예? 먹고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쉬어요?” 


아주 간단한 치료법을 알았지만 실천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번역도 먹고살려고 하는 일인데 무작정 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실제로 손가락에 근육이 붓는 내 증상은  6개월이나 이어졌다. 그것도 통증이 점차 사라졌다기보다는 아픈 걸 참고 일을 하니 인이 박이게 됐다. 


하지만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고 하는 것처럼 번역가도 일이 꾸준히 들어올 때 열심히 번역을 해야 한다. 몸이 아프다고 하나둘 일을 거절하면 거래처로부터 잊히기 십상이다. 이건 출판 번역가나 기술, 영상, 게임 등 어떤 분야의 번역가든 비슷하다. 프리랜서의 처지란 게 다 그런 게 아닐까. 


자기 계발서에 보면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라’라고 그럴듯하게 떠들지만 그것은 책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일 뿐, 아무리 대단한 번역가도 일할 수 있을 때하지 않으면 다른 번역가로 쉽게 대체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큰 병이 아닌 이상 몸이 좀 힘들다 해 돈벌이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쭈욱!  


게다가 번역가치고 직업병 한두 개쯤 갖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이를테면 거북목은 물론이고, 컴퓨터를 많이 봐 시력이 나빠지거나 타자를 많이 쳐 손목과 손가락이 아프다든지 오래 앉아 있는 탓에 고관절이나 무릎에 통증을 느끼는 것들이 번역가들의 흔한 직업병이다. 언젠가 한번은 번역가 카페에 누군가 이런 질문을 올리자 번역가들이 너도나도 댓글을 달았다.  


“번역 일 시작하고 눈이 많이 침침해졌는데 혹시 다른 번역가분들도 직업병이 있나요?” 

“저는 허리가 아파 의자를 바꿨어요.” 

“저는 고관절이 너무 아파서 1시간 작업하면 잠깐 스트레칭하고 다시 일해요.” 

“저도 눈이 피곤할 때가 많아서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쓰고 작업합니다.” 

“저는 방아쇠수지 증후군이 생겼더라고요.” 

“저도 방아쇠수지 증후군이래요. 그런 병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니까요.” 


방아쇠수지 증후군은 엄지손가락의 통증과 함께 중지, 약지손가락을 접었다 펼 때 당겨지는 느낌이 들거나 딸깍거리는 소리가 나는 증상이다. ‘수지’란 손가락을 가리키며, 총의 방아쇠를 당길 때처럼 손가락 힘줄이 당기거나 소리가 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작가나 번역가처럼 손가락으로 타자를 많이 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방아쇠수지 증후군을 직업병으로 달고 산다. 


하지만 이런 직업병들도 결국 꾸준하고 성실하게 내가 해야 할 일을 해 왔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일 것이다. 번역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집에서 한가하고 여유롭게 앉아 타자만 치고 있으니 편하겠다고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힘들다. 수면 위로 보이는 모습이 어떠하든 먹고살기 위한 일은 누구에게나 항상 고되게 마련이다. 몸의 특정 부위가 자꾸 아프다는 게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나는 번역가로서 열심히 살아 냈다. 


생사의 위험이 도사린 치열한 전쟁 속에서 쉴 새 없이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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