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XX 번역 아카데미입니다.”
어느 날, 낯선 메일 하나가 메일함에 도착했다. 메일이 쌓이는 걸 절대로 보지 못하는 성격인 데다 업무용으로 쓰는 메일함으로 온 번역 아카데미 메일이라니.
“뭐야? 나 보고 번역 강의라도 들으라고 온 홍보 메일인가? 번역 몇 년차인데……. 어디서 내 정보가 샜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일을 열었더니 뜻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안녕하세요, 번역가님. XX 번역 아카데미의 A 대표입니다. 전에 서점에서 뵈었었는데 잘 지내고 계신가요? 번역 중개 에이전시 김 차장님께 출판 번역 기획서를 너무 잘 쓰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 ‘출판 번역 기획서 작성’ 강의를 맡아 주실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 보려고 메일을 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중국 책 전문 서점이 있다기에 언젠가 호기심에 들른 적이 있는 곳의 대표님이 보낸 메일이었다. 출판계도 그렇지만 번역계는 생각보다 좁아서 한두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특히나 활발히 활동하는 중한 출판 번역가는 그렇게 많지 않아 더더욱 인간관계의 폭이 좁은 편이다.
대표님이 메일 속에서 언급한 김 차장님은 내가 고양이 책으로 홀로서기를 했을 때 먼저 연락을 주신 번역 중개 에이전시의 관계자였다. 그분이 바로 그 고양이 책의 출판 저작권을 타이완 출판사와 한국 출판사 사이에서 중개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당시 차장님은 대체 이 두껍고 어려운 책을 번역한 사람은 누군지 궁금해 내게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그 일을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반쯤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차장님 덕에 난데없이 기획서 강의를 맡아 달라는 메일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그 회사에서 독립을 해 어엿한 대표님이 됐지만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차장님을 볼 때마다 느낀다.
물론 계기는 김 차장님의 칭찬 한 마디였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쓰기는 엄청 썼나 보다.’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쉽게 열리지 않는 출판사들의 문 앞에서 실망한 적도 많았는데 이제 그 출판 번역 기획서로 남들에게 강의를 할 일이 생기다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출판 번역 기획서로 20권의 책을 출간하려면 실제로 써야 하는 기획서는 그보다 몇 배가 많아야 한다. 경험에 비춰 봤을 때 열 권의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쓴다면 그중에서 출판사들의 선택을 받게 되는 책은 두세 권만 돼도 선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책 한 권의 출판 번역 기획서를 통과시키려면 네댓 권의 기획서를 써야 한다는 뜻이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까지 일 년에 한두 번은 서점 투어를 떠났고, 갈 때마다 열 권이 훌쩍 넘는 책들을 이고 지고 한국으로 돌아왔었다. 아무리 문이 자주 열리지 않는다고 해도 번역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란 생각으로 무식하게 기획서를 쓰고 또 썼다. 그런 경험이 쌓이니 출판 번역 기획서를 제법 잘 쓴다는 칭찬도 종종 듣게 됐다.
“세경 번역가님, 저 이번에 A 출판사에서 도서 검토서를 써 달라고 요청받았는데 출판사 샘플이 없느냐고 물으니까 세경 번역가님이 쓴 검토서를 보내 주더라고요.”
“예? 정말요? 그 출판사 의뢰로 검토서 써 드린 적이 있는데, 그게 샘플이 됐나 보죠?”
“그러니까요. 아는 번역가님 이름을 거기서 보니까 엄청 반갑더라고요.”
언젠가 아는 영한 번역가님에게 이런 소식을 듣고 신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도서 검토서란 출판사에서 외서를 소개받고 한국에서 출간해도 될 만한 책인지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출판 번역가에게 검토를 의뢰하는 문서로 출판 번역 기획서와 쓰는 양식이 매우 비슷하다. 다만 번역가가 보내는 출판 번역 기획서와 달리 검토서는 출판사가 직접 의뢰하는 일이라 검토 비용을 따로 받는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번역가에게는 돈이 되는 일인 셈이다.
내 경우에는 출판 번역 기획서를 많이 쓰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가 쌓여 검토서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그런데 같은 중한 번역가도 아니고 영한 번역가님에게 내 검토서가 어느 출판사의 검토서 샘플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역시나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아마 그렇게 쌓인 경험들이 내 무기가 되어 출판 번역 기획서 작성 강의를 맡아 달라는 요청도 받게 된 게 아닐까. 그동안의 노력과 고생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은 좋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생 치유가 불가능할 것 같은 내 소심한 성격이었다. 학교나 학원에서 선생님께 단 한 번도 먼저 질문을 한 적이 없는 내가 낯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번역 강의라니, 생각만 해도 눈앞이 하얘질 것 같았다.
“대표님,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무대 울렁증이 있어서요.”
“아……, 그런데 저희 아카데미가 원래는 오프라인 수업이었는데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해요. 일주일에 한 번씩만 수업하시면 되고요. 몇 주 수업을 하면 좋을지도 번역가님이 일정을 짜시면 되는데.”
“그, 그래요?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수업을 한다는 거죠?”
“네네, 수강생 분들도 그렇게 적극적인 분들이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중국어 전공자도 아니라 누굴 가르칠 주제가 아니라고 거듭 발을 빼 보려했지만 괜찮다며 등을 꾸욱 밀어 준 아카데미 대표님 덕에 결국 강의를 맡게 됐다. 강의란 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자신은 없었지만 출판 번역 기획서를 쓰는 것에는 익숙한 편이라 그나마 도전해 볼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왕 하는 거라면 수강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출판 번역 기획서 작성은 어쨌든 예비 번역가들에게 이론이 아닌 실전 활용이 가능한 수업이었기에 재능이 있는 학생이 있다면 데뷔에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 뒤, 직접 커리큘럼을 짜고 학습 자료를 만든 기획서 수업이 시작됐다. 화상 수업을 통해 만난 학생들은 꽤 의욕이 넘쳤다. 2주짜리 이론 수업과 출판 번역 기획서 3개를 작성하는 총 5주의 수업 기간 동안 학생들은 대부분 낙오하지 않고 잘 따라와 줬다. 물론 그중에는 배운 내용을 잘 활용해 출판 번역 기획서 작성에 재능을 드러내는 학생들도 있었다. 덕분에 5주짜리 기획서 수업이 몇 기수 지나가자 실제로 본인들의 출판 번역 기획서로 출판사와 번역 계약을 하는 학생들도 생겼다.
솔직히 나는 번역가도 연예인처럼 타고난 재능이 조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출판 번역가는 문장 표현력이 뛰어나야 하기 때문에 노력만으로 따라잡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기획서 작성 수업 중에 두각을 나타낸 학생들에게 더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가능성이 있는 쪽에 더 큰 관심을 줬다고나 할까.
그런데 한번은 한 학생이 5주 수업이 다 끝난 뒤에도 내게 꾸준히 도움을 요청했다. 본인이 번역하고 싶은 동화책을 찾고 기획서를 쓴 다음 어느 부분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면 좋을지 봐 달라며 부탁한 것이다. 학생이 처음 보내온 출판 번역 기획서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성인서로 실습을 했을 때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었는데 정작 자신이 하고 싶다는 동화로 기획서를 쓰니 책 소개도, 줄거리 정리도, 책의 재밌는 부분을 골라 번역하는 발췌 번역도, 작품에 대한 분석도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책은 나쁘지 않은데 기획서 작성이 너무 엉망이라 이걸 어디 손을 본다고 될 일일까?’
이런 의심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창피함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기획서를 살려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학생의 노력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학생에게 족집게 과외를 하듯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하고 또 어떤 식으로 고쳐야할지도 일일이 가르쳐 줬다. 그렇게 두세 번 메일이 오가자 학생의 출판 번역 기획서는 드디어 기획서다운 모양을 갖추게 됐다.
“책이 나쁘지 않으니 분명 관심을 갖는 출판사가 있을 거예요.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책을 낼 만한 출판사들에 메일을 보내 보세요.”
“예, 선생님. 그동안 도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학생을 격려하기는 했지만 그 출판 번역 기획서가 정말 통과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달 뒤, 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생님, 저 그 동화책 계약하게 됐어요!”
“어머나, 정말요? 너무 잘됐네요. 진짜 축하드려요.”
심지어 들어 보니 첫 종이책 번역 계약이었음에도 번역료 단가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학생의 번역 계약 소식에 나는 진심으로 내 일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학생이 과연 계약에 성공할 수 있을까?’라고 의심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물론 타고난 재능은 엄청난 선물이다. 그런 재능을 갖춘 사람은 남들보다 시작점이 훨씬 앞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노력을 퍼붓는 사람은 가끔 타고난 능력자들을 앞지르는 예외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런 기분 좋은 예외를 만난 나는 먼저 선을 그으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될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짓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