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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Oct 02. 2023

무식한 번역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번역

“직역과 의역, 어느 쪽이 좋은 번역일까요?” 


언젠가 번역가 카페에 이런 주제의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현직 번역가들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아마도 보통 사람들은 번역가들이 직역파와 의역파로 나뉘어 치열한 토론을 벌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의견은 의외로 한쪽으로 쉽게 기울어졌다. ‘클라이언트 즉, 의뢰하는 고객이 원하는 쪽으로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돈 주는 고객이 의역을 원하면 의역을, 직역을 원하면 직역을 해 주는 것이 속 편하다는 말이었다. 글의 제목만 보고 번역가들의 의견은 어떨지 궁금했던 나는 ‘그게 맞는 말이네.’라고 생각하며 무릎을 쳤다. 


번역하는 사람들도 결국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 생활인이자 직업인임을 감안하면 직역을 할지 의역을 할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분수에 안 맞는 사치일 수도 있다. 특히나 회사들을 주로 상대하는 기술 번역이나 유행에 민감한 웹소설, 웹툰, 게임 번역 등은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의역을 하고 싶다고 해도 돈 주는 사람이 직역을 해 달라고 하면 거기에 맞춰 줄 수밖에. ‘저는 의역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해 봤자 이 상태의 번역으로는 번역료를 줄 수 없다고 하면 솔직히 답이 없다.


그나마 내가 몸담고 있는 출판 번역이 직역과 의역 가운데에 어느 쪽이 좋은 번역인지를 깊이 있게 고민하는 분야일 것이다. 다른 번역 분야에 비해 출판 번역은 그만큼 번역가의 역량이나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18년차 출판 번역가라고 떠들어 대지만 사실 나 역시 평소에는 ‘어떤 것이 좋은 번역일까?’라고 고민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일에 치여 살다 보니 고상하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틈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번역가 카페에서 어떤 것이 좋은 번역이냐고 묻는 진지한 질문을 마주할 때면 한 번씩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게. 대체 좋은 번역이란 뭘까?’    


번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것이 우연이었기에 뭐가 좋은 번역일지를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당장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자체가 살얼음판 같은 미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종종 무식한 번역가라고 칭한다. 중국어 전공자도 아니고, 중국어를 오래 배우거나 번역을 따로 배운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판 번역가로 나름 경력이 쌓이고, 직접 번역하고 싶은 책들을 찾게 되면서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지를 가끔 묵직하게 생각하게 됐다. 요 몇 년 사이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판 번역 기획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 번역을 할 때야 깊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하면 한 번이라도 번역에 대해 더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기획서 강의를 할 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이미 번역한 책의 원서를 가지고 자기 스타일에 맞춘 새 출판 번역 기획서를 써 보라고 숙제를 내준다. 책이 한국에서 안 나온 셈치고 ‘이 책을 출판사에 어떻게 팔 것인지’ 재주껏 기획서로 작성해 보라고 하는 것이다.


출판 번역 기획서에는 필수적으로 ‘발췌 번역’이란 요소가 들어간다. 책에서 가장 재미있거나 반전이 있다든지 등장인물의 개성이 잘 드러난 부분 등을 선정해 A4 용지 2, 3장 분량으로 번역하는 것을 바로 발췌 번역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번역가의 번역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기에 번역가들은 기획서를 쓸 때 이 부분을 무척 신경 쓴다. 또한 책이 이만큼 흥미롭다는 점을 출판사에 어필해야 하기 때문에 발췌 번역은 확실히 중요하다. 그런데 숙제로 낸 학생들의 기획서를 검사하다 보면 속된 말로 기가 찰 때가 있다.   


“혹시 발췌 번역하고 소리 내어 읽어 보셨어요? 여기서 누가 주체이고, 목적어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이거 번역하면서 앞뒤 문맥이 통하지 안 맞는다는 걸 분명히 아셨을 텐데 왜 이대로 두셨어요?”      


기획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대부분 전공자 출신이거나 중국어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본인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 글을 옮기는 게 아니라 글과 싸우고 있는 예비 번역가들을 보면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흔히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오래 번역을 하다 보니 번역가는 결코 작가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출판 번역가는 남의 글과 싸움을 벌이며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를 겨루는 사람이 아니다. 


번역가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닌 작가와 독자뿐이다. 어떤 글을 번역할 때는 최소한 독자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번역을 내놓아야 한다. 앞뒤가 안 맞는 줄은 알지만 ‘내 해석은 여기까지’라고 무책임하게 덜렁 내놓는 것이 아니라. 숙제로 그런 무책임한 번역문을 보게 될 때면 나는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조언한다.


“이 문장을 책에서 봤다면 어땠을 것 같으세요? 번역가조차 이해하기 힘든 문장투성이인 책을 독자가 돈을 내고 사 볼 수 있을까요? 만약 서점에 나온 책에서 이런 글을 봤다면 어땠을까요? 출판 번역가는 책 속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번역가라면 한 문장, 더 나아가 한 문단, 거기서 더 나아가 한 챕터, 마지막으로 책 전체의 문맥을 꿰뚫듯이 파악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온전히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좋은 번역은 단순하다. 독자가 읽었을 때 외국 작가가 썼는지도 모를 정도로 막힘없이 읽을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좋은 번역이지 않을까. 번역가는 적어도 작가의 글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번역이 좋다고 이름이 난 책들을 살펴보면 작가가 전달하려는 주제를 또렷이 드러내면서도 원래의 문장을 해치지 않고 독자들이 매끄럽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옮겨 놓았다. 중화권 책을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내 최대 관심사도 ‘독자가 이 책을 쉽고 매끄럽게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우리말로 옮길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번역가는 훌륭한 창작자가 아니라 좋은 전달자이다. 물론 번역을 하다 보면 의역을 해야 할지 직역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내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독자에게 뭐라고 전달하면 효과적일지 몰라 딱 맞는 우리말 단어나 문장을 찾는다고 고심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번역가가 최우선으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책을 읽는 독자를 고려한 가독성이다. 이 두 가지만 마음에 새기고 있다면 그것이 의역인지 직역인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고 번역가마다 입장이 다를 수도 있다. 


다만 무식한 번역가가 생각하는 것은 결국 ‘작가와 독자’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번역가는 작품의 주연이 아닌 조연 같지만 아무렴 어때? 세상 모든 작품은 주연과 조연, 단역으로 이뤄져 있고 어느 하나만 빠져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걸. 


무엇보다 작품만 반짝반짝 빛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조연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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