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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Oct 02. 2023

19금 번역이 열어 준 신세계, 웹소설

자의식 과잉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직접 번역한 책들의 감상평을 인터넷으로 가끔 검색해 보는 취미가 있다. 다행히 성(姓)까지 붙이면 흔한 이름은 아니어서 이름만 쳐 봐도 내 번역서에 대한 감상평을 올린 독자들의 블로그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한 6년 전쯤 내가 번역한 소설에 대한 감상평을 남긴 블로그를 보게 됐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애정을 갖고 있는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감상이 적혀 있기에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댓글을 하나 남겼다. 


‘이 책의 역자입니다. XX 작품은 제가 공을 많이 들여 번역했던 단편 소설 모음집인데 재미있게 읽으시고 블로그에 감상평까지 올려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책은 몇 년 전 이미 번역을 했지만 출판사의 변심으로 출간이 되지 못했다가 나중에 다른 출판사를 주인으로 맞아 어렵게 출간됐던 터라 특별히 마음이 더 가는 아이였다. 물론 작가님의 글들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평소와 달리 그 블로그에 더 댓글을 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며칠 뒤, 댓글을 남긴 블로그의 주인장이 내게 쪽지를 보내 왔다. 


“안녕하세요, 번역가님. 저는 A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하다 지금은 독립해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라고 합니다. 흥미롭게 본 소설의 번역가님이 제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 주시다니 신기하네요.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상평을 잘 썼다고는 생각했지만 블로그의 주인장이 편집자 출신이라니 정말 뜻밖이었다. 게다가 댓글 하나로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될 줄이야. 실제로 그 댓글과 쪽지를 계기로 편집자님과 연락을 하며 지냈다. 당시 책 번역 밖에 모르는 바보였던 나는 어느 날 편집자님과 웹소설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됐다.


“번역가님은 웹소설 보세요?” 

“아……, 웹소설을 들어 보기는 했는데 돈 내고 본 적은 없는데요.” 

“요즘은 종이책에서 웹소설이나 웹툰으로 출판 시장의 판도가 조금씩 옮겨 가고 있는 추세예요.” 

“그래요? 제 주위에는 웹소설 보는 사람이 거의 없던데.” 

“2, 30대 독자들 중에는 웹소설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아, 정말요? 그걸 정말 돈을 내고 봐요?” 

“그럼요. 웹소설 같은 경우에는 편당 100원이면 볼 수 있으니까 종이책 보는 것보다 큰돈 들지 않는 것 같아서 한 편, 두 편 보다 보면 나중에 막 지르게 되는 거예요. 한 편 보는 데에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으니까 후루룩 보면서 시간 때우기도 좋고요. 웹소설이나 웹툰이 바로 대표적인 스낵 컬처죠.” 

“아하……, 그렇군요.”


사실 편집자님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진짜 웹소설 같은 걸 돈 내고 보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라고 반신반의했었다. 두꺼운 책도 아니고 고작 편당 몇 천자짜리 이야기에 돈을 낸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집자님이 내게 번역 의뢰를 하셨다. 


“제가 사실 앞으로 웹소설 시장의 비전을 보고 1인 출판사를 내게 된 거거든요. 웹소설은 인기 있는 장르가 정해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저는 19금 BL이 전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19금 BL이요? BL이 뭔데요?” 

“Boy’s Love의 약자예요. 여자끼리면 GL이라고 하고요. 대충 어떤 건지 아시겠죠?”

“아, 알 것 같네요. 근데 그것도 19금이 있어요?”

“그럼요. 19금 독자들은 일단 나이가 있는 편이라 지갑도 잘 여는 편이에요.”

“아아, 그렇군요.”

“그래서 말씀인데 제가 타이완에서 판권을 산 19금 BL 작품이 몇 권 있는데요. 번역가님이 번역 좀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요? 저는 웹소설 번역은 해 본 적이 없는데요. 게다가 19금이라니, 그거 꼭 실명으로 번역해야 하나요?” 

“19금이라 내키지 않으시면 필명 쓰셔도 돼요. 그런 번역가님들도 많고요.”

“아……. 제가 생각을 좀 해 볼게요.” 


웹소설 번역은커녕 직접 웹소설을 본 적도 없던 나는 일감을 선뜻 맡기가 망설여졌다. 거기다 19금이라니,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상당히 고민이 됐지만 앞으로 비전이 있는 분야라니 나름 도전 의식이 생겼다. ‘어차피 번역은 다 똑같은 번역인데 19금이라고 뭐가 다르겠어? 나는 프로 번역가잖아. 일은 일일 뿐이야. 거기다 안 해 본 경험을 한번 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편집자님, 제가 19금 번역 한번 해 볼게요!” 


의지를 다지며 번역 작업을 시작한 것은 좋았지만 막상 접하게 된 중국어로 된 19금 웹소설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전까지 19금이라고 해야 야한 영화 몇 편 본 게 전부였던 나는 문화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게 대체 뭐야? 19금 장면이 무슨 몇 페이지마다 한 번씩 나오네. 맙소사, 독자층이 대부분 여자라면서? 이걸 여성 독자들이 좋아한다고?’ 작업을 시작하고도 한동안 뭘 어떻게 글로 옮겨야할지 망설여졌다. 내용도 야했지만 중국어로 된 원문을 번역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에는 고통이었다. 


애초에 우리말로 된 19금 BL을 봤어도 깜짝 놀랐을 텐데 번역은 중국어로 된 본문을 머릿속으로 일일이 상상해 가며 우리말로 옮겨야 하는 작업이니 더 괴로울 수밖에. ‘커다란 손이 오른쪽 허벅지를 감싸자 A의 다리 사이에 무언가가 금세 단단해졌다.’ 이런 류의 원문을 번역하고 있노라면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내 얼굴이 다 빨개졌다. 게다가 하필 19금 웹소설을 세 권이나 번역하기로 계약을 하는 바람에 한동안 정신이 피폐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필명을 써서 번역자로 이름을 올렸던 나는 당시 그 작품들이 어느 플랫폼에 연재됐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평소 책이 출간되면 직접 대형 서점을 찾아 알뜰히 매대를 살폈던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뭘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웹소설도 몰랐고, 19금도 몰랐고, BL은 더더욱 몰랐기에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나 자신도 모르는 저항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웹소설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2,700억 원 시장에 지나지 않았던 웹소설 시장은 현재 1조 원 시장으로 매우 가파르게 성장했다. 불과 6년만에 이 정도의 성장이라니 ‘비약적’이란 말이 딱 어울린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앞으로 출판 시장의 판도가 바뀔 거라는데 번역가도 뒤처지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며 한 편, 두 편 보기 시작한 웹소설은 금세 내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돈이 아까워 맛보기용의 공짜 분량만 봤는데 어느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유료로 웹소설을 결제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됐다. 


확실히 웹소설은 기존의 책으로 보던 소설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형식과 내용이 트렌디하면서도 간결하고 즉흥적이면서도 오직 재미에만 초점을 맞춘 점들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깊이는 떨어질지 몰라도 출퇴근 시간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가벼운 볼거리를 원하는 독자들이 분명 앞으로 더 많이 웹소설을 찾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낯설기만 했던 웹소설과 친해지기로 작정했다. 어쩌면 앞으로의 내 먹거리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것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고 때로는 거부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결국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 또한 사람의 몫이 아닐까. 새로운 것 모두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웹소설을 접하며 폭넓은 시야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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