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에 관심이 생긴 것은 다행한 일이었지만
뭔가를 새롭게 배우기에 나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상당히 돌머리란 점이었다.
이토록 쿨하게 스스로 돌머리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나의 솔직함에 '그래, 있는 척, 잘난 척, 아는 척하는 것보다 낫지.'라고 자위하는 편이다.
어쨌든 어린 시절부터 나는 뭔가를 배우는 데에는 정말 Born to be 젬병이었다.
남들 다 배우는 피아노도, 남들 다 그리는 그림도, 남들 다 외치는 웅변도, 남들 다 하는 공부도
나는 꽤, 객관적으로, 어지간히 재주가 없었다. 특히 공부는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늘 중간이나 그 아래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다. 친구들 말을 빌리자면 나는 학창 시절 남들이
노는 시간에도 혼자 책상에 앉아 뒤로 넘기는 '문제 은행'이란 두꺼운 문제집을 풀고 있는 아이였다.
수업 시간에도 졸지언정 한 번도 팔베개를 베고 꿈나라로 떠난 적이 없다.
아예 안 했으면 모를까 들인 품에 비해 나의 성적표는 늘 초라하고 안타까웠다.
이런 내가 홍콩 영화와 장국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어가 배우고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대학을 가야 했던 90년대 중반은 한창 중국어가 붐을 이루던 때였다.
중어중문학과는 소위 '뜨는' 학과라 준수한 성적이 받쳐줘야 원서라도 내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지식하기로는 한 고지식했던 나는 중어중문학과가 있는 대학에 가야만
중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정말 단순무식하게 생각했다. 내 마음 편하게 말하자면 순진했다고 해야 하나?
고3이었던 그 해, 나는 수학능력평가시험을 망치고 말았다.
평소 모의고사보다도 점수가 안 나온 것이다. 그나마 내가 기댈 곳은 본고사였다.
지금은 본고사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논술과 수학, 영어 중에서 2, 3과목을 선택해
대학별로 따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개중에 글쓰기와 영어가 나은 편이라
논술과 영어 본고사를 보는 대학들에 지원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본고사에서도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결과는 서울에서 지원한 대학 3곳 모두 낙방, 낙방, 낙방이었다.
결국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서울 약대'뿐이었다. 우리 아버지 말씀으로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대학'말이다.
당시에는 전기대와 후기대 지원이 따로 있었는데 그마저도 의기소침해진 나를 대신해 사촌 오빠가
후기대 원서를 넣으러 갔다. 나는 나중에서야 내가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중문과가 아니면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기에 사촌오빠가 그나마 경쟁율이 낮아 보이는 곳에
원서를 넣어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우연한 선택은 훗날 신의 한 수가 됐다.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았던 탓에 중문과에는 원서 한 장 내보지 못했던
나는 이번 생은 돌머리라 어쩔 수 없나 보다라고 자신을 탓하며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꿈에서 꽤 빠르게 멀어졌다.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읽을 수 있는 브런치에서
13년차 중한번역가인 내가 굳이 돌머리였다고 직접 밝히는 이유는
흔히 번역가라고 하면 공부를 잘해야 하지 않느냐고 선입견을 갖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가는 의외로 IQ나 출신 대학, 학과, 남녀노소, 나이를 따지지 않는 공평한 직업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어쩌다 번역가'에 연재되는 글들을 통해 쭉 소개할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