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봉에서 뛰어내려야 할 때

by 달빛그림자

어젯밤에는 조카와 함께 아파트 단지에 새로 생긴

근린체육시설에 뜬금 없이 운동을 하러 갔다.

번역하는 사람이다 보니 일이 몰려 바쁠 때는

며칠씩 집에만 있게 되는 경우가 많아 일부러라도

하루에 한두 번은 밖에 나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평소 내 물음에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초등학교 6학년

조카가 웬일로 "밖에 운동하러 갈래?"라는 내 물음에

좋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밤 10시쯤 느지막이 나왔지만 근린체육시설에는

장난꾸러기 초딩들부터 배둘레햄 운동을 하시는

아주머니들까지 제법 사람이 많았다.

조카와 나는 사람들을 피해 근처 편의점에 들러

조카가 좋아하는 젤리를 1 플러스 1으로 득템했다.

젤리를 씹으며 돌아오니 아주머니 한 분만 빼고는

그새 다 사라지고 없었다. 몸을 앞으로 당기는

노젓기 운동부터 팔과 다리를 공중에서 휘적거리는

스키 운동, 등배근과 팔근육을 강화시켜 준다는

공중에 매달린 양쪽 줄당기기 운동, 어디에 좋은지

잘 모르겠는 두 개의 휠을 돌리는 운동까지 섭렵을

하고 있는데 조카가 두 줄로 서있는 철봉에 올라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조카의 키는 150센티미터가 좀 넘는데 철봉의 높이는

어림잡아도 165센티미터보다 조금 높아 보였다.

하지만 조카는 호기롭게 철봉에 매달리더니 양쪽 다리를

철봉의 한쪽 기둥에 꼰 뒤 순식간에 철봉 위로 올라갔다.

조카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철봉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짝짝짝 박수를 치며 대단하다고 엄지척을 해줬다.

하지만 좋은 분위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막상 철봉에 올라가보니 그곳은 조카의 생각보다

훨씬 높았던 것이다.

"고모, 여기 너무 높아. 나 못 내려가겠어."

조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처음에는 조카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철봉의 높이는 165센터미터가 좀 넘고 내 키도

그와 비슷했지만 두 줄로 된 철봉인데다 팔을 뻗어도

봉에 걸터앉은 조카를 여유 있게 받아 내리기가

어려워 보였다.

조카에게 양쪽 철봉을 하나씩 잡고 다리를 하나씩

내린 뒤 제자리뛰기 하듯 몸을 흔들어 앞쪽으로 뛰어내려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높이에 겁을 먹은 조카는 못하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양쪽 다리를 앞으로

빼고 앉은 채로 밑으로 뛰어내리면 어떨까 했지만

그건 조카의 키를 감안하면 더 힘들 것 같았다.

잘못하면 발목을 삘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나름 조카의 긴장을 풀어줄 요량으로

"야, 너 그러다 뉴스에 나오겠다. **동에 사는 초등학생

어린이가 철봉이 높다며 내려오지 못해 며칠째 철봉에 앉아

있다고 하는데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카가 이러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철봉에 앉아 있겠다고 울상을 지었다.

결국 조카가 좀 더 용기를 내어 양쪽 철봉을 하나씩 잡은 뒤

발을 하나씩 내리고 내가 뒤에서 조카의 엉덩이를 받친 다음

아이가 조금 내려오면 다시 허리를 꽉 붙드는 방법으로

무사히 철봉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삶도 높은 철봉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과 비슷하구나.'

살다보면 뭘 잘 몰라서, 자신감이 넘쳐서, 남들보다

잘나고 싶어서 저돌적으로 달려든 끝에 1단계 목표까지

올라갔으나 막상 오르고 보니 그게 끝이 아니고, 또 그곳이

내 예상보다 훨씬 높음을 실감하는 순간이 온다.

우리는 분명 삶의 다음 단계를 위해 그곳에서 뛰어내려야

하지만 높이에 겁을 먹으면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되고 만다.

하지만 겁이 난다고 마냥 그곳에만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제 다른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고

버티고 있으려고 할수록 힘이 빠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용기와 도움을 청하는 자세다.

당장 높은 철봉이 겁이 난다 해도 우리는 땅을 밟아야 하고

그러려면 밑바닥에 가라앉은 용기라도 끄집어내야 한다.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 해도 1단계 다음에는 2단계가 있고,

철봉에 걸터앉았으면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단계에만 정체되어 있거나 철봉에만 걸터앉아 있으면

결국 그는 도태되거나 바닥으로 떨어져 더 큰 부상을

입고 만다.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멋지고 그럴 듯한 착지가 아니라 해도 용기를 내어

발을 내밀어야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자신의 힘이

모자라다면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줄도

알아야 한다. 1단계까지 내 힘으로 올라갔다 해도

힘이 부치면 도움을 받아 2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결코 흠이 아니며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진짜 부끄러운 건 용기를 내야 할 때를 놓치고,

도움을 청할 때를 놓쳐 어차피 내려와야 할 바닥에

아프게 처박히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당사자가 먼저 용기를

내어 시도를 하고 다음으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린 조카가 숨을 가다듬으며 팔에 힘을 꽉 주고

양쪽 철봉을 붙잡아 아래로 내려 오겠다며 발을 내밀지

않았다면 나는 아이의 엉덩이와 허리를 받쳐 아래로

내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용기가 없다고 무조건 도움을

받으려고만 하면 용기도 없고 도움도 받지 않으려다

바닥에 처박히는 사람과 똑같은 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1단계 목표에 도달했는가? 그곳이 생각보다 높다 해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그 철봉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당신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전 24화늦긴 뭘 늦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