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김치국밥

by 달빛그림자

나는 일 년에 한 번 할머니를 만난다.

까치와 까마귀가 놓은 다리 위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날, 칠석.

우리 할머니는 음력 7월 7일 칠석에 돌아가셨다.

평소 잊고 지내다가도 칠석이 돌아오면 견우가 직녀를 만나듯

나는 슬프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할머니를 만난다.

마침 어제가 칠석이라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었었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다른 동네에 있는 실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고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우리집은 아파트였는데 좁다란 복도에 화환들이 잔뜩 늘어서 있고

현관문도 활짝 열려 있는데다 집밖까지 신발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무엇보다 생경했던 건 집밖에 걸려 있는 조등(弔燈)이었다.

그때는 그게 뭔지도 잘 몰랐는데 노란 불빛을 내는 커다란 등이

뭔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묘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서니 작은 오빠가 벌겋게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맞아줬다.

"뭐야?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내 물음에 작은 오빠는 울음기 가득한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할머니는 노환으로 내내 아프셨는데 내가 수영을 배우러 간 사이에 돌아가신 거였다.

그 시절에는 핸드폰이 없었고 부모님도 여기저기 연락하느라 바쁘시니

나는 알아서 오면 되겠거니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할머니에게는 많은 손주가 있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손녀였다.

실제로 할머니가 누구를 가장 예뻐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내마음에는 그랬다.

할머니는 아프신 동안 입버릇처럼 "아이고, 내가 죽으면 우짜노? 우리 손녀 시집 갈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데."라고 말씀하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눈에 할머니는 불사조였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도통 이해도 되지 않았고 실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이해도 되지 않고 실제가 되라라 생각지도 않은 할머니의 죽음이

성큼 내게 들이닥친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울고불고 난리가 나야 극적이겠지만

당시 나의 반응은 지금 생각해도 좀 뜻밖이었다. 분명 작은 오빠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울고 있었는데 나는 집에 사람들이 많은 게 좋았다. 손님들이 많아서 흥이 났다고나 할까?

심지어 나는 침대 위를 방방 뛰며 신나했다. 그 뒤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 사실 기억도 거의

나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 날 장지로 떠나기 전 관이 집에 들어왔었는데 고모들이 달려들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엄마,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해!"라고 했던 것만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렇게 떠나보낸 할머니가 다시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칼칼한 김치국밥 냄새가

내 코끝을 자극했다. 학교 갔다오면 배고플 딸을 위해 엄마가 준비한 간식이었다.

그런데 김치국밥을 본 순간 나는 불쑥 3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날 밤, 나는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김치국밥은 할머니가 가장 잘 하시던 음식이었다.

본래 할머니는 작은 고모댁에서 사셨는데 일 년에 몇 번씩 우리집에 와

한두 달씩 살다 가셨다. 그렇게 오실 때면 할머니는 이런저런 음식을 많이 해주셨다.

그 중에서도 자주 해주시고, 가장 맛있었던 음식이 김치국밥이었다.


물론 할머니 하면 김치국밥만 생각나는 건 아니다.

할머니는 누룽지도 잘 만드셨다. 어떻게 만드는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가스레인지 위에 밭솥을 얹어놓고 밥이 밥솥 벽면에 싹 붙게 누룽지를 만드셨다.

다 만든 누룽지는 밥솥 모양 그대로 쏙 빼낼 수 있었다.

할머니가 마치 마술쇼를 하듯 커다란 밥솥 모양 누룽지를 빼내 주면 우리 삼남매는

바삭바삭한 얇은 누룽지를 아작아작 맛나게도 씹어 먹었었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 방에 가면 엄마가 질색하던 음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미숫가루였다. 신기하게도 할머니 방 장롱에는 항상 미숫가루가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었다. 마치 마르지 않는 화수분처럼 장롱에서는 미숫가루가 계속 나왔다.

할머니 방에 들어가면 할머니는 스테인레스 대접에 미숫가루와 설탕을 듬뿍 넣은 뒤

물을 붓고 얼음을 동동 띄워 내게 건네주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애들에게 설탕을 너무

많이 먹인다고 싫어하셨지만 나는 할머니표 미숫가루가 좋았다.


할머니가 끓여준 김치국밥은 경상도에서 주로 먹는 음식이었는데

멸치 국물에 어린 손주들을 위해 잘게 썬 김치, 콩나물을 넣어 팔팔 끓이다

달걀과 찬밥을 넣고 푹 퍼질 때까지 끓이셨다. 거기에 떡국떡을 넣고

김가루를 뿌려 조금 더 끓이면 입안 가득 군침 도는 김치국밥이 완성됐다.

어떤 집들은 밥알이 살아 있도록 오래 끓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손주들이 소화가 안 될까봐 그러셨는지 정말 밥이 푹 퍼지게

끓여 주셨다. 그 김치국밥을 한술 떠서 입에 넣으면 새콤하고 칼칼한 김치향이

올라오면서 더운 여름에 없던 입맛도 되살아났다. 이열치열이라고 할머니는

여름에도 김치국밥을 자주 해주셨다. 어린 내가 음식을 먹어봐야 얼마나 먹어봤었겠냐마는

할머니의 김치국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다 있을까?'라고 생각했었다.

구수하다기보다는 입안이 산뜻해지는 깔끔한 맛이랄까.


내 기억 속의 할머니도 그런 분이었다.

시골 할매라지만 머리를 귀가 보이도록 짧은 커트머리로 자르고

방 안에는 먼지 한 톨 없이 틈만 나면 마른 수건으로 닦아대셨다.

고모집에서 우리집으로 오실 때면 어린 손녀를 위한 선물도 잊지 않으셨다.

물론 대단한 선물은 아니었다. 어떨 때는 어디선가 굴러다니던 골프공을 하나

주워오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어린이에게 낡은 골프공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할머니가 얼마나 좋았던지 그 골프공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게 사랑하던 할머니였는데, 중학교 2학년 엄마가 해주신

김치국밥을 먹고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할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지난날에 대한 미안함이

불현듯 몰려와 나는 베갯잇이 흠뻑 젖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사랑하던 할머니였는데 어째서 나는 울지 못했을까?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려서 실감을 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하고,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기에 이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리라.


그 뒤로도 나는 속상한 일이 있거나 외로운 기분이 들 때면

할머니를 떠올렸고 침대에 누워 청승맞게 울기도 했다.

때늦은 이별을 몇 년에 걸쳐 오랫동안 한 뒤에야

나는 할머니를 마음에서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다.


학창 시절을 보내고 사회에 나와 생활하며 김치국밥을 먹을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매년 칠석날이 돌아오면 나는 마음까지 뜨끈해지는

칼칼한 김치국밥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맛보다 향으로 기억되는 할머니의 김치국밥,

식탁에 앉아 크게 한술 뜨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다며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초등학생처럼 할머니와 마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쩐지 매콤하고 시원한 냄새에 코끝이 알싸해지는 기분이 드는 오늘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뜻밖의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