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쓴다는 것

by 달빛그림자

나는 끈기가 없는 편이라 오래 한 가지 일을 지속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런 내가 제법 오래 지속했던 일이 있다면

TV를 보는 것과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엄청난 TV광이었는데 정말 누가

말리지만 않는다면 아침에 TV를 켠 순간부터

한밤에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TV를 볼 수 있었다.

이런 내 TV 사랑은 대학교 아니, 사회생활을 한 뒤로도

꽤 오래 이어져 친구들과 술 한 잔을 하거나 밥을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러 집에 가는 길이 훨씬 즐거웠다.


요즘으로 치면 TV 덕후라고 해야 할 텐데 이제는

나이를 먹으니 그 재미 있던 드라마들도 일일이 챙겨보는 일이

확연히 줄었다. 평소 웃을 일이 별로 없어서인지 그나마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게 소소한 즐거움인 정도다.


물론 요즘은 TV 말고도 손에 꼭 붙어있는 스마트폰이 생겼으니

그 영향으로 TV를 조금 멀리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2007년생인 조카 말로 옛날 사람이다 보니

스마트폰도 100% 활용하지 못하거니와 예전의 TV처럼

그렇게 재미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그 다음으로 오래 지속하고 있는 일이

일기를 쓰는 일이다.

초등학교 때야 선생님께 의무적으로 검사를 맡기 위해 썼지만

중학교에 가서는 자발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는 특이한 아이이긴 했다.


중학교 때 큰 문구점에 간 나는 아주 앞뒤로

새빨간 표지로 만든 중간 크기의 스프링 노트를

일기책으로 골라 들었다.

핏빛으로 물든 일기책은 정말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빨간 일기책에만 일기를 썼다.

직접 손으로 일기를 쓰는 습관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쭉 이어졌는데 특이한 점은 일기에 기분 좋은 내용은 거의 없고

안 좋은 일이 있었다든지, 누가 미웠다든지, 무슨 일로

복수하겠다든지 같은 내용이 일기책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종의 데스노트 같은 일기책이었다고나 할까.


이것이 당시 쓰던 일기책 중의 하나였는데 이렇게 뻘건 일기책을

지금도 몇 권이나 계속 보관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때의 일기를 보면 그 무렵 내가 얼마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일기책 안은 온갖 저주와 절망이 난무하는

무법지대였다. 어쩌면 그런 불안한 감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 수 있는 TV에 더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보면 뭐 이렇게까지 암울하고 열 받을 일인가 싶지만

아마 당시 어린 소녀에게는 세상 일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였을 테고, 내 편은 하나도 없다고

느꼈을 것이며, 이렇게 만든 누군가를 저주하며 복수하고

싶었으리라. 어쨌든 마음 속에 맺힌 화를 쏟아낼 곳이 있었기에

그나마 나는 학창시절을 순탄하게 보낼 수 있었다.


대학을 간 뒤에도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일기를 썼는데

심리 자체가 얼마나 안정됐는지 그때의 일기를 보면

좋은 일이 있었다거나 일기를 쓴다는 것의 장점,

내가 하고 싶은 일 같은 아주 감성적이고 읽기 편한

소재의 일기들이 다수 등장한다.


컴퓨터가 대중화된 뒤로는(이렇게 말하니 정말 옛날 사람 같다. --;)

손으로 일기를 쓰는 일이 줄어들고 컴퓨터에 한글 파일을 만들어

계속 일기를 쓰고 있다. 중간에 한 번 컴퓨터 데이터가 날아가면서

몇 년치 일기가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일기를 쓰는 일을 꾸준히 지속중이다.

물론 예전보다 일기를 쓰는 빈도수는 줄어들었다.

또한 일기라기엔 한 달에 필요한 생활비가 얼마나 되고,

돈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쓰는 내용이 더 많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일기를 쓰는 내 자신에게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해주고 싶다. 덕분에 지난날의 나를 잊지 않을 수 있으며,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미래의 나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다든지, 뭔가를 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내용의 일기를 쓰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고, 부족한 부분들도

모두 나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머릿속으로만 기억했다면 벌써 휘발되어버렸을 내가

일기 속에는 오롯이 살아 있다.

때로는 울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내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주저앉아 있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그것은 흠이 되거나

창피한 일이 아니다. 항상 웃고 있고, 항상 즐거우며,

항상 신나는 나만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나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일기를 쓴다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쓰다보면

결국 말미에는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화를 내며 시작하든 울면서 시작하든 일기를 쓰다보면

끓어올랐던 감정이 가라앉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며 다시 힘을 내기로 다짐하게 된다.

누군가의 위로나 손길보다 나 자신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일기야말로 계속 지속해야 할 좋은 습관이 아닐까 싶다.


멋지고 근사하지는 않지만 나의 ,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일기는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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