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리듬

by 달빛그림자

사람들은 저마다에게 어울리는 생활의 리듬이 있다.

어떤 사람의 하루는 분 단위로 바쁘게 돌아가고,

또 어떤 사람의 하루는 두어 시간 단위로 느리게 돌아가기도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성향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하고 있는 일과 관련이 있기도 하다.

본래 나는 나무늘보처럼 느린 사람이라 빠른 생활 리듬에는

잘 적응을 하지 못한다. 밥도 느리게 먹을 뿐더러 잠도 많고

일도 더디게 한다. 아마 번역이 아니라 직장에 다녔다면

하루 건너 한 번씩 욕을 먹거나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을 것이다. 멀티가 되지 않는 나에게 번역가는

참 이상적인 직업이다. 먹고 사는 게 빠듯하다는 것만 빼고.


그런 '나'이지만 최근 몇 달은 생활의 리듬이 훨씬 느리게

돌아갔다. 솔직히 말해 먹고 살 일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해 가을부터 거의 며칠도 쉬지 못하고 책을 연달아

몇 권이나 번역했는데 어느 순간 느리게 흐르는 날들이

시작된 것이다. 번역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전업 번역가들에는 이런 날들이 초조하고 피 말리는 날들이겠지만 여러 해에 걸쳐 반복되는 패턴을 경험한

내게는 쉬어가는 타이밍일 뿐이다. 이번 쉼은 유난히

길었지만... --;

물론 책을 번역하고 있지 않다고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출판사들에 내가 번역하고 싶은 책을 소개하는

기획안을 열 개도 넘게 썼고, 그러려면 그만큼의 중국, 타이완 책들을 읽어야 했다. 그 사이 타이완으로 서점 투어도 한 번 갔었고, 조카와 상하이 여행을 다녀 오기도 했다.

또한 출판사 의뢰로 잘하지도 못하는 한중번역을 하기도 했고, 어떤 책의 검토서를 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브런치에 열심히 글도 쓰고, 쓰고 싶은 글의 아우트라인도

정리했다. 이렇게 보니 크고 작은 일이 제법 많았지만 그래도 쉬는 기간은 쉬는 기간이라 낮잠도 꼬박꼬박 자고, TV 예능 프로그램도 매일 출석하듯 빠지지 않고 봤다.

일상이 너무 느리게 흘러 양심의 죄책감 같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전 새 책을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생활의 리듬이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보다 일찍 일어나게 됐고

오전, 오후 시간을 나눠 번역 시간을 계산하게 됐으며 늦은 밤에도 예능 프로그램을 마음 놓고 볼 수 없게 됐다. 특히나

이번에는 번역할 다음 책이 정해져 있어서 번역 일정이 매우

타이트하다. 번역 기간 중에 친구를 만나 거나 집안 대소사로 2, 3일만 번역을 못해도 일정이 어그러지기 때문에 미리 쉴 날과 빡세게 번역할 날들을 계획하고 조정해놔야 한다.


어째서 일이란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행복한 푸념이겠지만 그 뒤로도 기획안 써서 돌린 책들 중에 몇 권이

출판사의 선택을 받아 작업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책이 어떻게 계약되고 번역되어 출간되는지는 다소 복잡하기 때문에 일일이 언급할 수 없지만 직장인으로치면

프로젝트가 한번에 몰린 것이라고 하면 쉬운 설명이 될 것이다. 늘 일이 좀 여유 있을 때 나눠서 들어오면 좋겠다고

투덜대지만 살면서 그런 일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한가할 때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불안해하다 일이 많으면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투덜대며 하루, 한 달, 일 년의 생활이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게 바로 인생 아니겠는가.


다만 여러 달 노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바쁜 생활에 적응하려니 아직까지 제 리듬을 회복하기가 만만치 않다. 앞으로 몇 달은 더 바빠야 할 텐데

얼른 이 빠르게 돌아가는 생활의 리듬에 몸과 정신을 맞춰야겠다. 그래도 먹고 살 일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


사실 오늘도 집안의 대소사가 있는 날인데다 번역 분량이

밀려 있어 교회를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좋아하는 글 쓰기를 미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란 마음 먹기에 따라

제법 나눠 쓸 수 있는 존재다.


내 몸은 아직 한가로움과 게으름에 젖어 있지만 단기적인 목표들이 정해진 이상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돌아가는 생활의 리듬에 적응해야겠다. 이런 일상에 감사하는 빠른

나무늘보가 되보리라.


당신의 생활은 어떤 리듬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또한 당신은 그 리듬에 박자를 맞추고 있는가?

느릴 때는 느리게, 빠를 때는 빠르게 생활에 적응해보자.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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