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스승

by 달빛그림자

새로 번역을 시작한 책이 내 예상보다 글자 수가 많아

브런치에서 글을 쓸 틈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기사 하나를 읽고 잊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올해 세는 나이로 100세인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가

세는 나이로 90세인 서예가이자 제자인 이곤의 전시회를

찾아 나이가 먹을수록 놀지 말고 공부를 하라고 당부했다는

기사였다. 두 사람은 김형석 교수가 연세대에서 재직하기 전

중앙고에서 교사로 7년 동안 일할 때 선생님과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고 했다. 구순의 제자는 백 살의 스승을 자신의 전시회에

초대했고, 그 나이 또래의 중앙고 동문 십여 명도 스승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단다.


“백 년을 살아보고 두 가지를 깨달았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한 법이니, 나이가 들어도 놀지 말고 공부하게.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당부하고 싶네. 스스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정말 인생이 끝나버리거든.”

“나는 지금도 매일 일기를 쓰면서 작년, 재작년의 일기를

꼭 읽어봐.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계발을

하려는 의욕이 필요하다네. 나이가 들어도 그래.”

100세 스승의 가르침에 90세 혹은 그에 가까운 늙은 제자들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을 모습을 떠올려보니 어쩐지

웃음이 절로 났다. 어디 가면 가장 큰어른 대접을 받을 만한

나이에 여전히 까까머리 고등학생처럼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노인들이라니 상상만해도 귀엽지 않은가?


한평생을 살며 이런 인생의 스승이 있다는 것은 진정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내게도 이런 인생의 스승이 있다.

초등학교,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국민학교였던 시절

6학년 담임 선생님이 내게는 그런 스승이었다.

당시 결혼도 하기 전의 총각이었던 선생님은 열성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이었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모두 떠난

교실 책상 위로 철사를 일일이 엮어 조롱박이 열리는 그늘을

만들어 주셨고, 그 옛날 조별 활동으로 아이들에게 연극대회를

열어주시기도 했다. 세상에 공부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걸

알려주셨고, 스승의 날에는 굳이 아이들의 선물을 마다하셨다.

행여나 싶어 몇몇 아이들이 들고온 양말 선물은 학교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들께 선물로 나눠주셨다. 졸업을 앞두고는

학급 문집을 만들자고 제안하셨고, 아이들이 나서서

문집의 제목을 짓고, 표지 그림도 그리고, 각자 글도 하나씩

써서 문집에 실었다. 아이디어는 선생님의 것이었지만

실천은 오롯이 아이들의 몫이었다.


선생님은 어느 아이에게도 치우치는 관심을 보이거나 혼을 내지

않으셨다. 덕분에 따로 선생님과 특별한 이야기를 나눠보거나

개인적인 추억을 쌓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보니

모든 아이에게 고른 관심을 주고 어느 아이 하나 소홀하지 않되

누구도 섭섭하지 않게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새삼 깨닫게 됐다. 당시 우리는 선생님을 노총각이라고

놀려댔지만 지금 생각하면 고작 삼십대 초반이었던 선생님이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훗날 학교 동창을 찾는 사이트인 '아이러브스쿨'에 6학년 6반 방을

개설해 같은 반 동창생들을 불러 모은 것도 선생님이셨다.

덕분에 우리는 꾸준히 반창회를 이어갈 수 있었고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일 년에 두어 번은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신다. 가끔은 선생님과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더 어렸을

때는 선생님을 모시고 클럽에 간 적도 있다.


한동안 장학사 등으로 일하시던 선생님은 정년을 2년 정도 남기고

다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돌아가셨다. 단톡방에 이 소식이

알려졌을 때 오래된 제자들은 "선생님이 교장선생님으로 가신

그 초등학교 애들은 진짜 좋겠네요."라며 한 목소리로 말했다.

빈 말이 아니라 '선생님처럼 좋은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이라면

그 학교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이런 좋은 스승을 단 한 분이라도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 분명하다. 우리의 인생에서 부모님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어린 시절의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모님이

하면 잔소리 같은 말도 선생님이 해주시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사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공부도

요즘말로 빡세게 시킨 분이었는데 지금 와서 기억에 남는 건

선생님이 몸으로 보여주셨던 성실하고 열정적인 삶에 대한 가르침이다.

덕분에 소심쟁이였던 나도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힘을 내며

없던 자신감도 부풀릴 수 있었다.


내게는 초등학교 6학년의 조카가 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훗날 기억에 남을 만한, 삶에 영향을 끼칠 만한 선생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같다. 부디 어린 조카도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지나기 전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좋은 스승 한 분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서로를 생각하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스승과 제자로

우리 6학년 6반 친구들도 선생님이 90세, 100세가 되실 때까지

오래오래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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